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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Mar 12. 2024

_니라샤와 함께


  수평선의 별빛에 잦아들었던 그 해 겨울, 당신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번호 그대로네? 이게 얼마 만이니, 잘 지냈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자 다소 무덤덤했던 당신의 얼굴이 환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순간을 마냥 기다려온 듯했다. 아샤가 말했다.

  “지금 어디야?”


  약속한 장소로 가자 멀리 아샤가 보였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둘이 만난 것도 그곳과 그곳이 아닌 곳을 통틀어 고작 세 번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중 두 번이 여행의 우연한 만남이었으니, 그토록 긴 세월 마음에 담아온 만큼 서로를 알진 못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당신은 한눈에 아샤를 알아봤다. 기억이 조금 흐릿해질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만난 곳은 지난번과 같았다. 그때처럼 골목골목을 거닐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구차한 말을 피했기 때문이다.

  사실 각자 지내온 시간만큼 당신과 아샤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둘의 공통분모는 여전히 그곳뿐이었지만, 이제 둘 모두 그곳이 아닌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딱히 둘을 묶어줄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간간이 그곳을 떠올렸지만, 아샤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 확실히 마모된 듯했다. 아샤가 말했다.

  “그땐 참 어렸어.”

  “그랬지.”

  그뿐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각자의 근황으로 옮겨갔다. 어색했다. 둘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차선의 삶, 어긋난 것의 이 인분…… 그러자 눈앞에 있는 건 아샤(희망)가 아니었다. 닮았지만 성격이 정반대인 쌍둥이였다, 문득 아샤의 반대말은 니라샤(절망)라는 게 생각났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삶이었다. 그날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


  다시 연락을 받은 건 송년회가 있던 날 밤이었다. 가식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당신은 휩쓸릴 필요 없이 조금은 침전된 기분으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화기 너머 들려 온 목소리에 당신은 무장해제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될까?”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당신은 이미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상황을 살피던 당신은 급한 용무가 생겼다며 자리를 빠져 나왔다. 몇몇은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지만, 굳이 따져 묻진 않았다. 결국 타인에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당신도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가 말했다.

  “그럼 가 봐.”

  그러지 않아도 가볼 참이었다.

  얼마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까지 온 모양이었다.

  “어디야?”

  “잘 모르겠어. 국도 어디쯤에 있는 버스 정거장이야.”

  버스를 탔는데 잘못 내린 것 같다고 했다. 밖은 춥고 어둡고 눈까지 내려 구조 신호에 가까웠다. 문득 그곳의 북쪽으로 향하던 길에 표류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아서 찾아오라고 할 순 없었다.

  “보이는 건물이 있어?” 

  “글쎄, 주변에 아무것도…… 아, 식당이 하나 보여.”

  그렇게만 말하면 사실 당신도 어딘지 몰랐지만, 오가는 길에 그런 곳이 있었다는 것을 용케도 기억해냈다. 가 보면 알 듯했다.

  “거기서 기다려.”

  “고마워.”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은 밤, 차를 몰아 국도의 상행선을 조금 달리자, 이미 문을 닫았음에도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는 식당이 보였다. 그 언저리에 버스 정거장이 있고, 낯익은 실루엣이 하나 서 있었다.

  찾았다며 차를 멈추려는데, 곁에 놓인 짐들을 보고 조금 놀랐다. 손가방과 캐리어 따위를 잔뜩 쌓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일이 있었고, 부득이 여기까지 떠밀려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다면 당분간 여기서 좀 지낼 수 있을까?”

  이치상 그런 일은 명확히 해야 했지만, 어느새 짐을 받아 트렁크에 넣는 당신은 전혀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좀 좁은데 괜찮겠어?”


  뭔가 극적이었다. 상상도 못한 순간 연극의 한 장면이 당신의 삶에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꼬인 실타래가 한 번에 풀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영문을 몰라도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두기로 했다. 언젠가 깨어나야 할 꿈이고, 그 끝이 바라는 대로만은 아닐지라도, 일단 붙잡고 싶었다.

  그해 겨울, 그렇게 당신은 니라샤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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