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함께라면 절망도 좋았다. 적당한 기대를 걸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며 원치 않는 것들에 둔감해지다보면 그럭저럭 시간은 흐를 것이다. 불현듯 낯선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겠지만, 그런 삶도 나름 나쁘지만은 않을 듯했다.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단지 가슴 언저리에 작은 구멍이 하나 나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곳으로 해일이 밀려왔다. 악몽을 꾸었고,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오래된 수첩을 꺼내 펼쳐 보았다. 예상했듯 거기엔 지금과 다른 당신이 있었다. 수첩 속의 당신이 물었다. 이대로 정말 괜찮겠냐고.
당신의 삶은 더할 나위 없으면서,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제 와서 더 원하며 바라는 걸 모두 좇겠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훼손되어버린, 말 그대로 구멍이 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문제의 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 당신은 궁금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신을 안다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지인이라고 했다.
“그곳에 대해 안다고 들었어요.”
두 눈을 크게 뜨며 귀를 의심했다. 분명 ‘그곳’이라고 했다.
“마침 그곳에 일이 있어서 사람을 찾다보니 당신을 소개하더군요.”
당신은 섣불리 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혹시 누가…….”
“추천인은 원칙상 알려 드릴 수 없어요. 그냥 옛 친구라고 하더군요.”
옛 친구…… 그 말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상대가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도 사정이 있을 것이고 당장 그곳에 가달란 요구를 하긴 어렵지만,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어쨌든 솔깃한 제안이었다. 나머지는 만나 보면 알 것이고, 무엇보다 다시 그곳,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곳은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왔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당신은 전화를 끊었다. 거듭 고민했다. ‘혹시라도 함께 가자고 한다면…….’ 그러나 당신이 구하는 답은 당신에게 없었다. 망설인 끝에 당신은 아샤에게 말을 꺼냈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곳?”
기분인지 모르지만 아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제안이 들어왔어.”
“갑자기?”
“응.”
“가고 싶어?”
“…….”
당신은 얼굴을 마주보지 못했다. 그러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것으로 아샤도 느꼈던 것 같다. 당신은 가고 싶다는 것을, 여기서 끝이란 것을.
“혹시 넌…….”
“난 더는 그곳으로 가지 않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샤가 답했다. 더 이상 그곳과 동의어가 아니었으니까. 희망은 절망이 되었고, 다시 그곳에 희망을 품으려면 절망과 멀어져야 했다. 참 얄궂었다. 잠시 마주쳤던 둘의 인연은 그런 식으로 또 다시 엇갈리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배신한다는 느낌에 괴로웠다. 눈이 녹듯 뜻밖의 단꿈에서 언젠가 깨어나야 한다는 건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랐고 설마 당신이 먼저 작별을 고하게 될지는 몰랐다.
그럼에도 결심은 섰다. 지금 당신은 잘못된 곳에 있었다. 문제가 없는 곳은 없지만, 가슴에 난 구멍을 메우려면 다시 그곳으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