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속에서 ‘얼굴 없는 면접관’이 당신에게 물었다.
“번호는?”
“780401입니다.”
왜 하필 그 번호인지 모르지만, 떠오르는 숫자를 무작위로 내뱉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게요.”
“네.”
“당신은 지금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머리가 하얘졌다. 먼저 자기소개를 한다거나 이력서의 내용을 하나씩 검증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당신은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 네, 저, 글쎄요. 무슨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건지…….”
“뭐든, 당장 생각나는 걸 말해 보세요. 그게 곧 당신의 괴로움을 의미할 테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좋아요, 모른다는 것도 일종의 괴로움이죠. 자, 서둘 필요 없어요. 무엇을 모르죠?”
“모르는 건 많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당신의 무지와 저의 무지는 다르니까, 한번 당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해 보세요. 무지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죠?”
“옛 친구가 했던 말입니다.”
“뭐라고 했죠?”
“그가 말하길, 전 미련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미련의 산물. 그 말이 당신의 무지와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괴로움과는 또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답을 했더니 질문이 늘었다. 무언가 맥락을 놓친 느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덫에 걸린 걸까? 하지만 뭐든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면접이고, 또 꿈이니까. 당신은 궁리한 끝에 대답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무지했다는 걸 인정했고, 그러자 그건 곧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전 미련이 많으니까요.”
그러자 면접관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틈으로 얼굴 없는 얼굴의 윤곽이 살짝 드러나는 듯했다. 그럴 일 없지만 당신은 언뜻 리처드 파인먼을 떠올렸다. 면접관이 말했다.
“좋습니다. 780401번, 당신은 당신의 미련과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요상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난 당신은, 다만 아직 살아 있고 병원이며 그곳으로 갈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많이 아픈데 몸이 더 아픈지 마음이 더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곁에 아샤가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했다.
‘가슴 속 깊이 알고 있었지만 부정해온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록 당장은 큰 괴로움이 될지라도…….’
하지만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졸음이 쏟아졌고, 당신은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의사와 아샤가 당신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얼마간 안정을 취한 뒤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안다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분히 그간의 사정을 말해 오해를 풀고, 다시 인터뷰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중앙엔 가로로 긴 탁자가 놓여 있었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면접관들이 건너편 자리를 포위하듯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타원형의 탁자를 반으로 나눠 한쪽엔 면접관들이, 다른 쪽엔 당신이 앉아 방 안의 모든 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뤘다. 공간의 균형을 비트는 건 당신과 면접관들 간의 머릿수 차이고, 그 대칭의 불균형이 위압감을 조성했다. 방 안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미련과 괴로움에서 해방된 사람이었다. 면접관의 어떠한 질문에도 자신감 있게 답했다. 사실 당신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답을 알진 못했지만, 답할 수 있는 건 성의껏 답하고, 답을 모르거나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선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로 응하며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일찍이 살며 그만큼 똑 부러진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다소 얼이 빠져 있을 때도 많은 당신이지만, 간밤의 꿈, 꿈의 예방 주사 덕분인지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의지가 있었다. 당신은 진정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당신을 안다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한번 가봅시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아샤에게 소식을 전하자 돌아온 말이었다. 막상 말로 꺼내고 보니 더더욱 이기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대의 의견이나 거취를 묻기엔 이미 늦었다. 아샤는 담담한 말투로 덧붙였다.
“잘 됐네.”
일찍이 아샤는 그렇게 말했었다.
“둘 다 선택할 순 없어. 그곳에 가려면 떠나야 하고,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그곳을 잊어야 해. 네가 원하고 널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면 돼. 그걸 거스르려 하니까 힘든 거야.”
결국 어중간한 건 있을 수 없다는 걸까. 당신은 호주머니 안의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꺼낼 자신이 없었다. 상대방보다 먼저 자신부터 진정 그걸 원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곳에 가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일 뿐, 어떤 결말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불안정하면서 붙잡아 두겠다는 이기적인 약속이었다. 침묵의 무게가 숨 막힌다는 듯 아샤가 말했다.
“가, 가고 싶잖아.”
“…….”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어?”
“…….”
“있으면 말해봐.”
아샤는 이제 그만 담판을 지으려 했다. 무엇이 되었든 결정을 존중하겠다며.
“난, 그곳에 가고 싶어.”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당신은 그곳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필요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아샤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곳을 향한 새로운 희망과 함께, 당신은 한때의 희망이었던 절망과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