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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Mar 19. 2024

_사고는 나기 마련이다


  당신은 서두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출근 도장을 찍고 자리로 가 의자에 외투를 건 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구두를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가까운 식수대에서 믹스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낮은 건물이지만 허허벌판에 솟아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느덧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아직 아침 공기가 좀 차가웠다. 하지만 고비는 넘겼다. 한 겨울은 이미 지나갔다. 당신은 핸드폰을 열어 약속 시간에 맞춰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자리로 내려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다만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일을 조금 앞당겨야 했다. 태연한 척 행동하며 당신은 해야 할 일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시간 있으면 저녁에 다들 한잔 하지?”

  아뿔싸, 부장이 선수를 쳤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당신도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 이단자를 색출하듯 주위를 돌아보던 부장의 시선이 당신에게 닿자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무슨 선약, 데이트?”

  “아닙니다.”

  “그럼?”

  다그치는 걸 보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질문이 길어졌고 그럴수록 당신의 핑계 거리는 궁했다.

  “…….”

  “어디, 면접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그렇게 답하자 부장과 당신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부장은 한동안 당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훤히 벌거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선약이 있다면야.”


  출발해야할 시간이 지났지만, 당신은 다들 나가는 것을 본 뒤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약속 장소는 멀고 이미 러시아워에 접어들 시간이었다. 늦을까 봐 조마조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급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는데, 핸들을 꺾는 손놀림과 액셀을 밟는 발놀림이 평소보다 거칠어졌다.

  연거푸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필 이럴 때일수록 찾는 사람이 많았다. 만약 부장이나 동료라면 늦게라도 참석하란 얘기일 듯했다. 아니면 언제 오냐는 아샤의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간에 그 소리는 그곳에 가려는 당신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벨소리를 무시하고 달렸다.

  차는 국도를 따라 램프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기서 톨게이트가 있는 좌측 차선으로 곧장 붙어야했다. 핸들을 꺾어 급히 끼어드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달려온 차량이 당신의 차와 충돌했다. 미처 후방을 살필 생각도 하기 전이었다. 당신의 차량은 굉음과 함께 크게 뒤틀렸고, 본능적으로 힘을 주어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버틸 수 없었다. 차는 그대로 밀려나가 도로변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망, 했, 다. 죽음이 성큼 다가온 순간, 당신은 무력하게도 그런 말만을 떠올렸다. 역시 눈앞에 ‘해일’이 덮쳐 오면 순식간에 휩쓸려 갈 뿐이었다.


  잠시 후, 뒤집어진 차 안에서 당신은 깨어났다. 어처구니없게도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는 생각부터 했다. 그러자 누군가 추궁했다. 대체 지금 어디냐고. 분명히 혼자 타고 있었는데…… 혼미한 당신은 자신 없이 읊조렸다. 사고가 났다고, 그래서 가지 못한다고. 그러나 상대는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 마음이 바뀐 거라면 미리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 했다.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반드시 갈 생각이었다며, 이건 액땜일 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다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당신의 간절한 애원에도 상대는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회는 이미 줬다고 생각해요. 기억 못 하는군요. 당신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거짓말…… 어리둥절함 속에 물리적 시간을 거슬러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을 안다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친구. 그렇다면 혹시…… 하지만 채 말을 이어 가기도 전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참아요, 지금 구조대가 오고 있어요!”


  그 다음의 기억은 또 가물가물하다. 얼마 지나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린 듯했고, 당신은 까마득한 정신의 공동 속에 길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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