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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10. 2018

피해자의 말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

박민정 소설집『아내들의 학교』의 <행복의 과학>, <A코에게 보낸 유서>

 오늘날 피해자라는 위치는 매우 연극적인 역할이 되어 버린 것 같지 않나요? 피해자는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명해내야 하는 의무를 진 존재로 취급 받습니다. 피해자에게는 이중적인 기대가 중첩되는데, 그들이 논리적이고 분명하게 피해사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고통의 참혹성을 드러내는 존재 자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에 놓인 피해자의 두 가지 역할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피해자가 온 존재로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느라 분투하는 동안, 우리는 가해자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지요. 가해자의 죄의 형량은 마치 피해자가 우리가 기대하는 피해자의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는 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민정의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에 수록된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는 시퀄처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소설은 가족사로 한국여성에 무차별적인 적대감을 가졌던 일본 남성의 살인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어요. 출판기획자인 하나는 살인자 기노시타 히로무가 자신이 출간을 맡은 일본작가 류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배다른 형제임을 알게 됩니다. 류의 책이 흥행에 실패한 후, 하나는 살인사건의 희생자인 박영희씨의 이야기를 출간하려는 계획을 세우죠. 그것은 진실을 알아버린 자로서 갖게 된 사명감과 출판인으로서의 책임감이 결합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 희생자 박영희의 일기와 편지는 이미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어 접근도 비교적 쉬웠지요. 하나는 당시 자료의 공개를 주도한 고 박영희의 정신적 동반자이자 현재 국회의원인 최영은을 만나지만, 그녀는 평소의 패기 넘치는 모습 대신 참담한 모습으로 하나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경솔하게 그 일을 언급한 것에 대해 내내 후회하고 있습니다. (…) 나는 그 기록이 영희가 내게 보낸 내밀한 편지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나에게 가졌던 그 아이의 진심을 훼손해버린 것 같아 오랫동안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 내가 공개한 일기가 일본 신문에도 번역되어 연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모욕감이 들었어요. 살인자가 영희의 일기를 읽게 되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죽여버린 사람에게도 인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반성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어요. 끔찍한 추측이지만 살인자가 영희의 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었죠. 그런 식으로 소비되면 나는 정말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나를 좌절하게 합니다. 


*박민정, 『아내들의 학교』, 문학동네, 2017에서 <A코에게 보낸 유서>, p.110-111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영은이 우려한대로 살인자는 이후 일본에 번역된 박영희의 일기를 읽었고 그 사실을 유서에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뻔뻔하게도 ‘영희의 일기를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그녀의 운명을 수태한 사람이 영자였다는 걸. 그녀들이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자만합니다. 한국 여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로 그는 조선학교 여학생 에이코를 겁탈하고, 한국에서 두번째 에이코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죠. 그는 영희의 진솔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혹은 당해야 하는) 운명으로 위장하는데 사용합니다. 자신의 범죄에 대한 뻔뻔한 합리화이지요. 하나는 차마 이 사실을 최영은에게 알리지 못합니다. 


 과연 세상에 말해지는 수많은 희생자, 피해자의 이야기들은 어떤 형태여야만 그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자신의 시련과 고통에 대한 고백은 무척 힘겨운 일입니다. 자신이 겪었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그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언어가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겨우 겨우 뱉어내진 고백의 말들을 사회에 전달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하나 같은 매개자도 많이 존재하죠. 피해자들의 말들은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아픔을 알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시발점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말들이 가해자들에게 이용되고 문제를 고착화하는데 사용될 뿐이라면? 사람들에게 자극거리나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소비된다면? 정말 참담하죠. 


 하나가 느꼈을 고민의 무게를 저는 그대로 이어받았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함께 '피해자들의 말은 어떻게 들려지고 읽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 역시 어렵지만 끊임없이 안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조금 더 살아볼 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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