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한별 아나운서 Jan 21. 2019

2012년, 유튜브를 시작하다

[AI가 방송하면, 아나운서는 뭐해? #04]

한 걸그룹이

제가 진행하던 음악 프로그램 ‘콘서트 필’을 찾았습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멤버 개개인의 실력도 좋았고,

방송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습니다.

녹화 분위기도 좋았고,

함께한 관객들도

새롭게 알게 된 이 걸그룹의 무대에 매우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이 방송은 앨범 활동을 정리하면서 했던

그 걸그룹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재밌는 방송이 이렇게 묻히는 것이 아쉬워서,

그 당시 MC인 제가 직접 관리하던 유튜브 채널에

평소와 같이 그날의 방송을 업로드했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제가 하는 방송과 방송 뒷얘기,

대기실 토크 등의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서 업로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유튜브의 힘이 막강하지는 않았던 때.

‘아무리 좋은 방송도 사람들이 볼 수 없다는 의미 없다’는 생각에

MC인 제가 직접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요.




이 방송은 앨범 활동을 정리하면서 했던
한 걸그룹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후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그 방송의 유튜브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해외에서 그 방송에 대한 자막을 달아서

직접 업로드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유튜브에는 그 걸그룹의 '직캠 영상'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콘서트 필 방송 영상을 활용한 '직캠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영상들이 생겨났습니다.

방송과 관련된 문의가 이어진 것도 그때입니다.

그 걸그룹의 노래는 서서히 순위가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1위를 차지하게 됐죠.

요즘은 너무나 보편화된 단어, ‘역주행’

네, 그 걸그룹은 바로

역주행의 아이콘 ‘EXID’였고,

그 방송은 역주행이 있기 전, 그들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는 EXID의 '콘서트 필' 직캠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그 걸그룹은 역주행의 아이콘 ‘EXID’였고,
그 방송은 역주행이 있기 전,
그들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방송만 잘 만들면 돼.”

선배들은 늘 말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방송을 만들면 시청자는 알아서 선택할 것이라고 말이죠.

물론 방송국에서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다고 시청자가 알아서 선택할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선택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시청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까지가

‘좋은 방송’을 위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방송을 만들어도

시청자가 방송의 존재조차 모른다면?

우리가 TV 방송으로 좋은 방송을 만들어도

시청자가 TV를 보지 않는다면?

TV를 보더라도 방송권역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우리 방송이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미디어를 소비하는 패턴이 달라지고

시간과 공간, 플랫폼이 달리지고 있다면

당연히 방송도 거기에 맞춰서 변화해야만

우리가 만든 ‘좋은 방송’을 시청자의 ‘선택지’에 넣을 수라도 있지 않을까?

(물론 선택지에 들어간다고 무조건 선택받는 것도 아니겠지요)






저는 그때 유튜브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그때 유튜브를 통해 방송과 콘텐츠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의 시청자가

어떻게 우리 방송의 존재를 알 수 있었을까?

유튜브에서 가능성을 봤던 것 같습니다.

플랫폼의 다양화, 시청자의 시청 패턴 변화.

어떻게 보면 방송에게는 위기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적어도 만날 수 있는 시청자의 범위가 좁은 방송에게는

이건 기회일 수 있겠구나.





그 사이,

싸이는 유튜브를 통해 월드 스타가 되었고,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1위를 차지했으며

다양한 방송사들이 유튜브를 기반으로 성장했습니다.

참 아쉬운 건.

제가 처음 유튜브를 시작하고,

그 필요성을 주장하던 2012년부터

우리 회사에서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한 점입니다.

아무도 그 필요성에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저 저 혼자 하고 있었거든요.

그저 개인적으로.

묵묵히.


만약 처음 유튜브를 시작한 2012년에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더 전에 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 함께 관심을 가져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는 그때 유튜브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아쉽지만,

이제라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위기를 넘어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됐으니까요.

그나마라도 시작된 것에 감사해야할까요?


아무튼 그 한걸음, 한걸음 속에서

작은 가능성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좌충우돌해가면서 말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관성들을 깨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몸소 느끼면서 말이죠.





만약 처음 유튜브를 시작한 2012년에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이전 03화 회사에서 만든 콘텐츠는 내 콘텐츠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