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방송하면, 아나운서는 뭐해? #05]
바야흐로 ‘캐릭터’의 시대
“우리 채널을 대표할 ‘캐릭터’를 만들면 어떨까요?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죠.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온라인에서 댓글도 달아주고,
가끔은 그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처럼
사진이나 영상도 찍고. 만남도 갖고.
무엇보다 캐릭터와 함께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원하잖아요.
놀이터.”
더 이상 시청자는 TV만 보지 않습니다.
방송국이 만들어서, 정해진 시간에 보여주는 방송을
무작정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는 시청자가 직접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직접 보고 싶은 영상을,
보고 싶은 방법으로 소비하는 시대.
시청자는 ‘보는’ 것을 넘어
‘참여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명 ‘야쿠르트 아줌마’의 동선을 검색해서
편의점에서는 살 수 없는 커피를 사고,
나쁜 사또에게 곤장을 맞는 체험을 위해
기꺼이 ‘한국 민속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방송과 콘텐츠는 일종의 ‘놀이’입니다.
업로드 된 콘텐츠(혹은 방송)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고, 의견을 나누며,
다음 콘텐츠에 대한 방향과 힌트를 제시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은
콘텐츠 자체가 커뮤니티가 되어
직접 참여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것이죠.
유튜버들이 구독자에게 ‘애칭’을 부여하는 것도,
소통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니까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함께 놀아주는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놀면서 참여를 유도하고,
패러디나 캐릭터의 진화도 기대할 수 있는 존재.
그래야 단순한 참여를 넘어 ‘팬덤’이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채널에 대한 선호도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방송국에서 그걸 왜 해?”
저에게 돌아온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왜’ 캐릭터를 만들고,
뉴미디어에 접목해서 시청자의 참여를 유도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포스트 뽀로로’를 꿈꾸며
남극에서 헤엄쳐,
BTS의 나라 한국까지 왔다는
EBS의 연습생 ‘펭수’가 등장했습니다.
EBS의 캐릭터지만,
방송 3사의 온라인 콘텐츠는 물론이고,
MBC <마이리틀 텔레비전>에서
도티와의 초통령 대결을 펼치고,
SBS <정글의 법칙>의 내레이션을 하고,
JTBC <뉴스룸>에도 등장했습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만남까지 이어지니
그야말로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죠.
덩달아 EBS가 만드는
‘자이언트 펭 TV’의 구독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어린이 방송용 캐릭터지만
2030 세대에게도 지지를 받으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펭수는 스스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펭수와 관련된 다양한 패러디와 일명 ‘짤’들을 만들고,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시청자였습니다.
펭수에게 각종 미션을 부여하고,
내가 좋아서 펭수의 이미지를
스스로 진화시키고 있는 것이죠.
수직적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엄연히 선, 후배가 있는 캐릭터 사이에서도 할 말은 하는 펭수의 모습에
그들은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감정 이입을 하고, 나의 모습을 투영시켜서
원하는 모습으로 캐릭터를 키워가고 있죠.
펭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합니다.
그게 펭수와 계속 ‘놀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MBC 김수지 아나운서도 펭수의 팬임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펭수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허망했습니다.
우리도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왜 우리는 논의조차 하지 못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고, 콘텐츠도 열심히 만들고 있지만,
왜 우리는 계속 실패만 하는 것일까?
펭수는 예외의 경우지만,
꽤 많은 방송국들이
뉴미디어 콘텐츠에 있어서는 고전을 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방송국에서 하는 뉴미디어 채널은 성공하기 힘든 것일까?
“방송국에서 그걸 왜 해?"
‘방송국에서 왜’ 캐릭터를 만들고, 뉴미디어에 접목해서
시청자의 참여를 유도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방송국 뉴미디어 팀이 성공하기 힘든 이유
저는 얼마 전까지 아나운서팀 막내였습니다.
10년 차 막내.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이 많은 막내로서 선배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회사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아나운서 직군으로는 처음으로
‘뉴미디어 팀’의 론칭에 참여하고,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크리에이터가 된 것이죠.
감사했습니다.
또 즐거웠습니다.
다른 팀에서도 합류하는 동료들이 생겼습니다.
함께 의기투합해서 재밌게 만들어보자 힘을 모았죠.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저희는 공통점이 있었거든요.
저희는 모두 각 부서의 막내였습니다.
왜 뉴미디어 팀에는 ‘막내’ 혹은 ‘후배’들만 가득할까?
사실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뻤으니까요.
흔히 ‘뉴미디어 팀’이라고 하면,
젊고 활기차면서 진취적인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젊고 활기차긴 합니다.
모두가 ‘막내급’이니까 젊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부서는 젊지만,
결정권은 ‘젊고 진취적인’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회사에서 ‘결과물’을 요구했습니다.
보통 조회 수와 구독자 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채널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구독자 증가와 조회 수를 의식해서
유행하는 포맷의 비슷한 콘텐츠들을
‘백화점’식으로 만들다 보면,
만드는 사람들도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우리 ‘채널’에 대해 헷갈리는데,
그 중요하다는 ‘구글 알고리즘’도
우리 채널이 헷갈리는 건 당연하겠죠.
“그냥 만들면 되는 거잖아?”
뉴미디어 콘텐츠라고 가볍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바라보는 시선은 가벼울 때가 많았습니다.
뉴 미디어는 방송의 ‘번외 편’이라는 생각도 많았습니다.
우선순위는 무조건 방송.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하던 모든 방송을 다 소화하면서,
퇴근 후에, 자원 봉사 하듯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동료들도 원래 부서에 일이 생기면 뛰어가야 했습니다.
명확한 역할과 지원이 담보되지 않으니 다들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조직의 자리에 꼭 필요한 인재가 있는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인턴이라는 이름의 친구들과 직원인 우리들도 수없이 바뀌어갔습니다.
방송의 하위 콘텐츠가 아닌,
독립적이고 전혀 다른 분야로 인정받았다면
휘발적인 인적 구성과 콘텐츠는 적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해내기에 급급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말하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뉴 미디어도 기존 ‘방송 문법’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방송을 ‘뉴미디어 플랫폼’에 옮겨놓는다고
뉴미디어가 되는 게 절대 아닌데 말입니다.
구글의 알고리즘을 등에 업고,
검색 기반의 플랫폼을 운영하는 유튜브.
뉴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의 접근법이
방송의 그것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광주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광주 맛집’을 잘 검색하지 않습니다.
이미 맛집 정보는 그들 머릿속에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방송국에서는 ‘광주 맛집’ 콘텐츠를 만들어,
광주 사람들을 타깃으로 업로드 합니다.
채널 분석을 해보면 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광주에 여행을 온 타 지역 사람들입니다.
방송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과,
검색 엔진 기반의 뉴미디어 플랫폼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은 다릅니다.
방송 문법과 뉴미디어는 관점부터 달랐습니다.
방송국은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고,
소통은 적었으며,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방송국은 아직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뉴미디어팀은 젊고 활기차긴 합니다.
모두가 ‘막내급’이니까 젊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100세 시대. 내 이름 앞에 붙은 ‘KBS’와 ‘아나운서’를 빼면 과연 뭐가 남을까?’
육아휴직을 하고 ‘윤슬이 아빠’로 지내던 날
문득 머릿속을 스쳐간 의문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아나운서 활동을 돌아봤습니다.
수많은 방송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청자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했지만,
정작 그 이야기 속에
‘나만의 이야기’는 무엇이 있었나 떠올려봤습니다.
별로 없었습니다.
아니 거의 없었습니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육아휴직으로 빠진 제 자리에는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현실.
이야기의 전달자로서 아나운서는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지만,
‘KBS’와 ‘아나운서’를 제외한
‘김한별’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캐릭터’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단순한 콘텐츠 소비를 넘어
‘참여’하고 ‘놀이’처럼 접근하는 시대.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를 더 친근하게 여기며,
기꺼이 이야기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수고를 하는 시대.
아나운서도 시대의 흐름에 맡게,
누군가에게 공감 받는 캐릭터가 되어야 하고,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이자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시청자가 변하는 만큼
아나운서도 ‘나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콘텐츠라는 무기를 갈고 닦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브랜드로 만들고,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필요했습니다.
뉴미디어 팀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나만의 이야기’는 오직 나만의 채널에서,
내가 구축한 플랫폼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뉴미디어 팀을 나와서, 이제는 ‘나만의 이야기’를 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의 전달자로서 아나운서는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지만,
‘KBS’와 ‘아나운서’를 제외한
‘김한별’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