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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Apr 19. 2024

인생은 생방송! 당신은 정말 잘하고 있는 겁니다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04]

‘생방송’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단어입니다

방송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생방송’

녹화나 편집도 없이 날 것 그대로가 시청자에게 전달되죠

그래서 방송이 더 생생할 수 있지만

생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 입장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방송이 바로 생방송입니다


스탠바이! 큐!

PD가 콜을 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아나운서의 입을 바라봅니다

방송 전체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PD이지만

시청자와 출연자, 그리고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기술은 아나운서만 바라봅니다

아나운서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방송이 진행되는 흐름의 신호입니다

생방송에서의 멘트, 동작 하나하나는 그래서 무겁습니다

때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내가 실수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필요한 기본실력을 갖췄다는 전제하에

그다음부터는 준비와 노력의 영역입니다

사람 이름부터, 상황, 용어, 배경지식 등

미리미리 체크하고 준비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노출되는 생방송의 특성상

내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상황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1시간 생방송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스태프도, 시청자도..


물론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도

생방송 상황에서는 수없이 많은 돌발상황이 생깁니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도 대비해야 하는 아나운서

모든 책임은 아나운서에게 향합니다

방송을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시청자는 방송의 최전선에서 

화면에 등장하는 아나운서만 기억합니다

방송에서의 사고나 실수는

오롯이 아나운서의 책임이 됩니다

사과도 아나운서가 하죠

시청자는 아나운서만 보고, 아나운서만 기억하니까요




NG도 녹화도 없는 생방송
아나운서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방송이 진행되는 흐름의 신호입니다
생방송에서의 멘트, 동작 하나하나는 그래서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생방송에 익숙한 아나운서들은 긴장을 안 할까요?

아닙니다. 긴장합니다. 그것도 많이.


KBS 신입 아나운서 연수시절

수업을 담당하셨던 한석준 선배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생방송 때 안 떨리세요?”

“떨리지. 당연히 떨리지. 떨지 않는 게 프로가 아니야. 안 들키는 게 프로야.”


수십 년 생방송을 해온 배테랑 아나운서 선배님들도

생방송을 하면서 떨릴 수 있다는 말이 놀라웠습니다.

떨리기 때문에 더 준비하고,

방송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는 얘기가 와닿았습니다

그러면서 선배님은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생방송에서 안 떨리는 순간, 그때 방송사고 나는 거야”


떨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

철저하게 준비해서 떨림을 최소화하고,

그렇게 나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그 떨림이 ‘설렘’이 된다는 말씀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아나운서로 수많은 생방송을 경험하다 보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죠


돌아보면 저는 ‘생방송 형 인간’이었습니다




생방송에서 안 떨리는 순간,
그때 방송사고 나는 거야




카메라에 빨간 불,

‘On Air’라는 표시가 들어오면

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오직 이 공간, 이 순간만 존재하는 것처럼 몰입하죠

내가 했던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

이 방송이 나가고 난 이후에 대한 걱정은 사치입니다

그저 이 순간,

이 방송이 좋은 방송이 될 수 있게 몰입할 뿐입니다

전 그게 좋았습니다

온전히 몰입하고 만족하고 난 후,

툭툭 털고 다음 생방송을 준비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설렘

저는 적당한 긴장감의 생방송이 좋았고, 또 잘했습니다


두 번째, ‘욱아(我)휴직’을 하면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방송을 내려놓는 것,

내가 없는 자리는 분명 다른 누군가로 채워질 텐데

과연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나를 찾겠다’ 다짐했지만

그런 저를 보는 가족을 생각하면

많이 조급해지기도 했습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걱정과 불안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던 제가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생방송’을 하는 데에는 최적화된 제가

정작 제 인생만큼은

‘생방송’처럼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네, 몰랐는데 알게 됐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도

어쩌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조금 괴로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상황입니다

다양한 감정이 공존하고 있어요

나의 나약함을 마주하는 일,

어렵지만 인정하고 내려놓는 일

지금 저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발견이고 만남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저는 실제 15년 동안 생방송만 해온 사람이잖아요

리허설도, 녹화도 없이 오로지 생방송만

그거..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NG도 없고, 녹화나 편집도 없죠

그뿐인가요?

아나운서는 MC, 진행만 하면 되지만

우리는 MC 뿐만 아니라,

PD, 작가 때로는 기술 감독까지 해나가야 합니다

이 방송에서 만큼은 누가 뭐래도 우리가 주인공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방송은 계속됩니다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생방송에서

너무너무 잘 해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생방송을 진행할 때 잘 안 풀리면

생방송의 또 다른 구성원인 객석과 시청자는

저에게 박수를 쳐줬습니다

그 박수에 저는 길을 잃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무사히 방송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받았던 박수의 힘을 요즘 새삼 느낍니다

제가 객석과 시청자의 박수처럼

오늘도 훌륭하게 생방송을 마친 당신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당신은 오늘도 무사히 ‘생방송’을 잘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다른 ‘생방송’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오늘 방송이 끝나도

내일 다시 같은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다니!


적어도

'내일 이 방송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아나운서 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은 거네요


당신은 정말 잘하고 있는 겁니다


‘생방송’을 하는 데에는 최적화된 제가
정작 제 인생만큼은
‘생방송’처럼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한별아나운서

#김한별작가

#두번째육아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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