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05]
모든 방송인의 로망,
자신의 방송에서 '프러포즈' 하기
네, 저는 그 행운의 주인공이었고
의도치 않게 '아나운서 계의 최수종'이 되었습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만난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만약 그 일이 내 직업이고
그 직업을 통해 인정을 받고
그 인정이 일상을 행복으로 충만케 하고,
그 행복이 에너지가 되어
다시 일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누구나 생각하는 행복과 열정의 고리.
저에게 '콘서트 필'이라는 프로그램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누군가 추억이라는 것은 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기억된다고 했죠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진 같은 추억 한 장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음악프로그램 MC만의 공간이 있습니다
오프닝과 토크, 클로징 사이
음악프로그램 MC인 저는 조금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그 뮤지션의 음악과 무대를 사랑하면서도
다음 순서, 그리고 관객의 안전을 챙겨야 하는 진행자
저는 양쪽 눈으로 두 공간을 동시에 바라봅니다
왼쪽 눈으로 보이는 객석은 박수로 뮤지션을 환영합니다
오른쪽 눈으로 보이는 뮤지션은 멋진 공연으로 화답합니다
원래는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공연과 음악을 '선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더군요
무대에서 공연을 선물하고,
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로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그 에너지를 받은 뮤지션의 텐션은 올라가고
더 멋진 무대를 관객에게 보냅니다
공연은 관객과 뮤지션이 함께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관객도 뮤지션도 모두가 주인공인 공연의 매력
모두가 행복한 한 장면입니다
관객도, 뮤지션도, 스태프도, MC인 저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 이 장면
저는 지금도 그 공간의 느낌과 공기, 온도를
온몸으로 떠올리곤 합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만난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공중파 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어
가장 진행하고 싶었던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고,
방송을 위해 좋아하는 음악 속에 빠져 살고
(방송 준비를 위해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줬죠)
좋아하는 뮤지션을 만나
평소에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면서
눈을 바라보며 대화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숨소리까지 들리는 가장 가까이에서
열정적인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늘 진심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온마음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였으니까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대한민국에 정말 몇 개 남지 않은
정통 음악프로그램의 최장수 진행자였으며,
그 몇 안 되는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자 중에서도
유일한 '비 뮤지션' '아나운서' 진행자로서 보낸 6년.
그 6년은 그렇게 콘서트 필과 진심으로 사랑한 시간이었습니다
덕업일치
저는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는 행운아였습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콘서트 필은
저에게도 정말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아나운서로서는 유일하게
6년이나 정통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2020 한국아나운서 대상 TV 예능상’을 비롯해
저에게 크고 작은 상을 안겨주었습니다
15년 동안 라디오 DJ '별디'가 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었죠
그리고 모든 방송인의 로망,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프로그램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꿈을 이뤄주었습니다
원래는 토크와 무대 사이,
관객을 위한 이벤트 시간이었습니다
방송에도 나가지 않는 팬서비스 시간이죠
콘서트 필 최초로 MC가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평소 그 시간에 화장실을 가던 스태프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카메라를 돌렸고
PD는 심혈을 기울여서 컷팅을 했습니다
네, 결국 그 장면은 방송까지 타게 됐고
저는 '평생 까방권'과 함께,
동료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상도덕(?)'을 어긴,
이른바 '아나운서 계의 최수종'이라는
질투 섞인 놀림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100번이 넘는 콘서트 필을 진행했지만
오늘처럼 떨리는 녹화는 처음입니다.
바로 당신이 이곳에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났을 때
저는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줄 몰랐어요.
그때 우리는 각자 따로 연애를 하고 있었죠.
그만큼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내가 말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고.
당신과 함께라면 난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보선 시인의 어느 문장처럼
이제 우리의 '이별'은 '이 별'을 떠날 때만 가능하게 됐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당신에게,
벅찬 사랑을 담아 조심스럽게 말해봅니다.
나랑 결혼할래요?
그렇게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돌연 사라집니다
원래 시청률과는 거리가 먼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경제적인 논리를 들이대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늘 개편 때에는 위기설, 폐지설이 돌았지만
시청자와 스태프, MC는 지켜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공영방송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
바로 '콘서트 필'이라는 걸,
없애려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거든요
덕업일치
저는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는 행운아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PD, 작가, MC가 한순간에 교체되었습니다
한 번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난 우리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3개월 뒤 허무하게 사라지는 ‘콘서트 필’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납득하기 힘든 결정들이 이어졌습니다
함께 목소리를 내줄 거라 믿었던 동료들은 침묵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뀌지 않는 모습에 힘이 빠졌습니다
비단 '콘서트 필' 이라는 프로그램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점점 변해갔고, 사라졌습니다
희망도, 미래도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기력함을 느껴가던 저는
혼자만 애쓴다고 달리질 것 같지 않다는 외로움에 힘들었던 저는
자연스럽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뀌지 않는 모습에 힘이 빠졌습니다
점점 변해갔고, 사라졌습니다. 희망도, 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