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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킴 starkim Apr 17. 2024

나의 첫사랑, KBS를 퇴사했습니다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02]

KBS, 한국방송공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방송사

몇 천 대 1의 경쟁률,

소위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

들어가기 힘들고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그야 말로 '좋은' 직장

꽤나 괜찮은 급여와 복지, 그리고 안정감


그러나 어떤 직장이든 평생 다닐 수는 없죠

정년퇴직이든 뭐든 언젠가 한 번은 퇴사해야 하니까요

중요한 건, 언제, 어떻게 퇴사하느냐 일 겁니다

저 역시도 그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참 슬프게도 KBS에 들어가서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갔던 첫 발령지에서요


"5년 뒤, 너는 어떤 모습일 것 같니?"


당시, 부장님이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나운서로서의 목표와 포부를 묻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방송과 되고 싶은 아나운서의 모습을 신나게 얘기했죠

알 수 없는 웃음 뒤로 부장님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저 쪽에 보이는 OOO 선배가 너의 5년 뒤의 모습이고

OOO 선배가 너의 10년 뒤 모습이야

20년쯤 뒤에는 나처럼 부장을 하고 있을 거야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직장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


놀랍게도 신입사원이 첫날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부장님의 ‘알 수 없는’ 웃음의 의미도 알 것 같았습니다


‘너 같은 신입사원 많이 봤고, 우리도 그랬어’


아찔했습니다

선배들의 모습이 싫은 게 아니라 예측 가능한 게 싫었습니다

내 인생이, 내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게 싫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첫날부터 신입사원에게 날린 강력한 ‘경고’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묵직한 한 방

그때부터 저는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절대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저 쪽에 보이는 OOO 선배가 너의 5년 뒤의 모습이고
OOO 선배가 너의 10년 뒤 모습이야
20년쯤 뒤에는 나처럼 부장을 하고 있을 거야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직장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




저에게는 오히려 쉬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정통' 아나운서는 아니었거든요

야구로 비유하면, 150km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습니다

빨리 인정했죠

아무리 해도 빠른 볼을 던질 수 없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없다면

저는 기교파 투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진 공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던졌더니 어김 없이 타자가 제 공을 치네요

그런데,

제 뒤에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타자가 제 공을 쳐도,

함께 방송을 만들어가는 동료들의 수비로 아웃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아나운서는 팀의 일원일 뿐이었죠

방송은 협업이니까요


투수가 강한 공으로 삼진을 잡는 것도 원 아웃

동료들과 함께 만든 아웃도 같은 원 아웃이었습니다

투수 혼자 삼진을 잡을 수 있는 

100점짜리 패스트볼은 없지만

동료를 믿고 맞춰 잡을 수 있는,

70~80점짜리 변화구를 여러 개 익히자!

제 전략이었고, 돌파구였습니다


덕분에 다른 아나운서들보다

더 다양한 방송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비교, 부러움, 욕심을 걷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결과보다 성장, 배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 걸 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보다 성장하고 있더군요

내가 할 수 없는 패스트볼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구에 집중하다 보니

큰 상도 따라왔습니다

'2020 한국아나운서대상 TV 예능상'

저의 5년 뒤, 10년 뒤의 모습이라던 선배님들은 받지 못한 상이었습니다




투수가 강한 공으로 삼진을 잡는 것도 원 아웃
동료들과 함께 만든 아웃도 같은 원 아웃이었습니다




100점짜리 패스트볼은 없지만70~80점짜리 변화구를 여러 개 익힌 덕분에, 저는 아나운서대상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일도, 방송도 많았고

반응도 매우 좋았습니다

칭찬도 많이 받았죠

한마디로 걱정이 없었던 시기


매일 아침에 하는 뉴스는 안정적이었고

라디오는 내 집처럼 편안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은 반응이 좋았고

처음으로 도전한 양궁 프로그램과 스포츠 캐스터는

신선하고 재밌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한국아나운서 대상 'TV 예능상' 큰 상도 받았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이구나'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생각합니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구나'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불안할 정도로 모든 것이 원만할 때,

너무 신나서 앞만 보면서 달리게 되지만

그건 어쩌면 위험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곤 했습니다


절정의 가장 높은 시기,

그 시기 뒤에는 크든 작든 반드시 내리막이 있을 텐데

그때 준비를 하지 않으면 꼭 슬럼프가 오더라고요

뭘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이 안에서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말이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순간 생각합니다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구나'



"유명한 사람이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고 싶어요"


네,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지만

저는 유명한 아나운서는 아닙니다

어차피 유명한 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노력한다고 반드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행복은 다르더군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거였어요

노력하면 가까워질 수 있는 거였고요

행복하기 위해 늘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13년 동안 새벽 뉴스를 했고요

저녁 뉴스를 ’메인‘으로 생각하는 방송국에서

저녁 뉴스 기회가 와도

가족과의 시간을 위해 새벽뉴스를 자청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꺼이 행복을 선택했습니다

유명해지는 것은 양보했으니(?)

행복해지는 것은 양보 안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행복을 위해 결심했습니다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소위 말하는 신의 직장


저는 그렇게,

나의 첫사랑과도 같았던

KBS를 퇴사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고 싶어요



나의 첫사랑, KBS를 퇴사했습니다


[김한별 아나운서 인터뷰]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323502833?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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