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01]
13년 동안 저는 아침 뉴스 앵커였습니다
늘 새벽 4~5시에 일어나 출근했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차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남들이 잠든 새벽부터 정성껏 준비합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래서 눈도 잘 뜨지 못하는 누군가의 귀에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오늘 이런이런 소식이 있어요'
누군가의 아침을 열어준다는 것은 참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저는 함부로 아플 수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새벽 뉴스 앵커부터 시작된 일과는
라디오 DJ, 예능 MC, 토론 및 교양 MC, 스포츠 캐스터까지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오던 제가 잠시 멈추게 됩니다
교통사고
그리고 머릿속에 발견된 무언가
처음 선생님은 '종양처럼 보인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시며
CT가 아닌 MRI를 권하셨습니다
단순 뇌진탕인 줄 알았던 사고가,
'죽음'과 '삶'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떠올리는 사건이 됩니다
딸을 만나기 두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상해 본 '삶의 마지막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일도, 방송도, 명예나 돈도 아닌 가족이었습니다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었습니다
단순 뇌진탕인 줄 알았던 사고가,
‘죽음’과 ‘삶’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떠올리는 사건이 됩니다
딸을 만나기 두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가장 바쁘고, 가장 화려하던 순간
저는 육아휴직을 선택했습니다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의 모습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족과의 시간은
저를 더 성장시켰고,
좋은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카메라, 객석의 박수는 없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존재인 가족의 응원 덕분에
하루하루 행복했던 저는,
그 행복을 책으로, 음반으로, 영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렇게 KBS 남자 아나운서 중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썼던 저는
자연스럽게 '라테파파'가 되었습니다
강연과 방송을 통해서
비슷한 고민을 가진 많은 분들을 만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나운서, 아빠, 남편, 작가, 강사, 크리에이터..
다양한 이름으로 또다시 바쁘게 달리던 시간
문득 돌아보게 된 뿌듯한 하루하루
안정적이고, 행복한 하루 속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어른인 척하다 문득 외로워지고, 주위엔 하나 없는 것 같아.
괜찮다고 소리치는 나는 뻔히 아픈데. 힘들다고 말하면 힘들까봐. 서둘러 숨기곤 해'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의 한 구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왜였을까?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노래 속 주인공이
'잘 버텼다고 다독이는' 가사가 왜 이리 나 같을까?
마치 먼 훗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토닥토닥 힘을 주는 느낌
지난 15년 동안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노래였는데,
이 노래를 나에게 들려줄 생각은 못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외치던 라디오 속 별디가
정작 나에게는 힘을 주는 법을 몰랐나 봅니다
저는 그렇게 차 안에서 한참을 울며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정말 모르고 있구나'
누군가가 정해놓은,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불리게 된 많은 수식어들
그런데 그 수식어들이 지워진
진짜 '김한별'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언제 행복하고 기쁜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가족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회사를 통해서,
마이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또 내 생각(이라고 착각한 것)을 전달했을 뿐
진짜 '내 것'을 전달할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떠올려본 경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희미해졌습니다
40이 넘은 나이,
행복한 가정,
안정적인 직장,
자랑스러운 직업을 가지고 있던 저는
사실 내가 진짜 행복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의 한 구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노래를 나에게 들려줄 생각은 못했었나 봅니다
용기를 내어, 두 번째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첫 번째 육아휴직은 아이를 키우는 육아(兒)휴직이었다면
두 번째 육아휴직은 나를 찾는 육아(我)휴직입니다
잘 버티느라 고생했던 나를 찾는 시간이죠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세상 돌아가는 내용 다 아는 척,
뉴스 앵커로 살아가던 아나운서가
나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너무나 서툰 사춘기 아저씨의 진짜 성장기입니다
가장 친한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모르고 있는 나에게 건네는
화해의 손길입니다
한쪽 손은 여러분께 내어드리겠습니다
함께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