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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May 08. 2024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10]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공원을 지나는 엄마와 남매가 보였어요.

여동생이 생떼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오빠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것이었죠.

누가 봐도 아껴 먹은 티가 나는 아이스크림.

조심스럽게 먹은 것으로 봐서 오빠가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여동생의 손에는 빈 아이스크림 막대가 들려있었습니다.


“넌 이미 먹었잖아.”

오빠가 말했지만 여동생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난감한 표정의 엄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OO가 양보하자. 오빠잖아.”

오빠의 표정이 궁금했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

충분히 어린 나이였습니다.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였고,

여동생처럼 생떼를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 

충분히 어린아이였습니다.

오빠라는 책임(?)과 본인의 본능 사이의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에게 엄마가 말했습니다.

“오빠는 원래 양보하는 거야.”

결국 아이는 체념한 듯

자신이 조심조심 아껴 먹던 아이스크림을 동생에서 건넸습니다.

“OO는 착한 아이니까. 괜찮지?”

오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계속 아이스크림에 가 있었습니다







충분히 어린 나이였습니다.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였고,
여동생처럼 생떼를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 
충분히 어린아이였습니다.



저는 첫째였습니다.

주변에 형, 누나 없는 진짜 첫째.

모든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많은 사랑과 많은 기대를 동시에 받았어요.

동생들이 보고 배우니까, 넘어져도 울면 안 됐습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하면 안 됐습니다.

'오빠니까. 형이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저는 어느 순간 원래 그런 아이가 돼있었습니다.

언제나 '늘 괜찮은 아이', '알아서 잘하는 아이'가 돼있었습니다.


부모님 기대를 저버린 적 없고, 크게 말썽을 부리지 않았던 착한 아이.

전 그게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저에 대한 믿음과 기대라고 생각했어요.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 늘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습니다.


‘한별이는 속마음을 더 보여줬으면 좋겠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늘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가까운 사람에게도 속마음을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습니다.

실제로도 늘 나는 괜찮았습니다.

크게 슬픈 일도, 크게 힘든 일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좋게 좋게.

전 늘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오빠, 안 괜찮아도 돼”

아내는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그리고 아프면 아프다고.

네, 저는 아팠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팠지만 표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표현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저는 늘 괜찮은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안 괜찮아도 되는 거구나'

어느 날인가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엉엉 울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어릴 적의 내가 너무 가여워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어릴 적 내가 생각났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어린 날’의 내가 너무 가여웠어요.


저는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우는 거였습니다.

어린 시절 감정을 참고만 있었던 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어른이 되었다고 믿고 있던 나는,

나를 찾는, 두 번째 ’육아(我)휴직‘을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좋게 좋게
저는 늘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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