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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킴 starkim Mar 02. 2018

착한 사람

나는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분쟁을 싫어했다. 좋게좋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 아내의 표현으로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소위 황희 정승식 사고의 소유자. 누군가와 크게 싸워본 적도 없었다. 싫은 소리 하는 게 싫었으니까. 물론 듣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불편한 상황이 싫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늘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 불편한 상황에서는 입을 닫았다. 그저 가만히 이 상황이 지나가길, 나를 피해가길 바랐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착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핵심은 거절이었다. 나는 거절을 못했다. 내 거절로 인해 서운해할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내가 거절하는 순간 멈칫하는 상대방의 모습, 난처해 하는 상대방의 표정, 어쩔 줄 모르는 상대방의 반응이 싫었다. 굳은 얼굴로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싫었다. 그 순간을 겪느니 차라리 ‘내가 조금 손해 보고말지.’라는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착하다’라는 표현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는 글을 봤다. 어원을 따졌을 때 우리의 ‘착하다’와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honesty. 내 감정에 가장 솔직한 것. 이것이 ‘착하다’와 가장 가까운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착하다’라는 표현을 ‘솔직함’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다. 자기감정에 솔직하기보다는 사회의 시선에,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과 틀에 맞춰 사는 이들에게 우리는 ‘착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자신의 감정을 외면한다. 나 역시 그랬다. 남들의 기준에서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내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결코 착하지 못했다. 



난 착하다는 얘기를 듣고 살았다. 알고보니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거였다.



남들의 기준에서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내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결코 착하지 못했다. 




 난 애주가였다. 술자리를 좋아했다.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좋았다. 몽롱하면서도 뿌옇게 기억되는 술자리 자체의 정겨움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친했던 사람과는 더 가까워질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외롭지 않았다. 술자리에 특화된 사람이었다. 적당히 밝았고, 적당히 흥도 있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편이었다. 일단 먹는 양 자체가 많았다. ‘외롭지 않다’는 이 느낌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그 느낌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많이 먹고 마셨다. 다행히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은 좋았다. 내가 애주가일 수 있었던 것은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 교통사고가 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몸은 술이 잘 받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실 조금만 마셔도 취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는 오기로, 체력으로 버티는 거였다. 체력은 자신 있었으니까. 술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술자리 분위기였다. 술자리에서도 나는 거절을 못했고, 주는 대로 마셨다. 버티기는 했지만, 다음날에는 힘들었다. 괜찮은 게 아니라, 티 내지 않고 버텼던 거였다. 그때는 내 몸보다 그 분위기가 더 중요했나 보다. 다음날이면 기억도 못할 그 분위기가.  



그때는 내 몸보다 그 분위기가 더 중요했나 보다. 
다음날이면 기억도 못할 그 분위기가.  



윤슬이가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어쩌면 어쩔 수 없이 거절이라는 걸 하게 됐다. 문득, 윤슬이와 둘이 있을 때 술에 취해 윤슬이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을 떠올렸다. 내가 아니면 목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 아이를, 나만 바라보며 온전히 제 몸을 의지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찔했다.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취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몸도 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맥주 한 모금에도 취한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더 바짝 차리게 되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게 이런 걸까. 

술자리에서도 내가 정한 기준 이상을 권하면, 자연스럽게 거절하게 됐다. 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지만, 사정을 얘기했다. 내게는 그 자리의 분위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러자 상대도 내 상황과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내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생각을 존중했다. 말하면 되는 거였다. 상대방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생각과 의지를 존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난 거절을 못한 게 아니라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거절할 수밖에 없고, 거절하고 싶은 내 감정을 솔직하게 상대에게 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진짜 배려일 수도 있다. 


윤슬이를 통해 하나하나 배워간다. 윤슬이 덕분에 나도 자라고 있다.



윤슬이가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어쩌면 어쩔 수 없이 거절이라는 걸 하게 됐다.



어쩌면 그동안 난 
거절을 못한 게 아니라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건 아닐까.



<라테파파> KBS 김한별 아나운서의 육아대디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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