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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쨈맛캔디 May 04. 2021

왜 보스 옆에는 똘마니들이 따라다닐까?

최근 방영 중인 SBS 드라마 < 모범택시 >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사적 복수를 대행해 준다는 내용이다. "걔네들도 똑같이 한 번 느껴봤으면 좋겠어요"라는 피해자의 말처럼, 매 회 속 시원하게 보여주는 복수극에서 많은 사람들이 통쾌함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그중 최근 방영된 '학교폭력' 에피소드와 '불법 동영상 업체의 갑질 사건'을 보면서 가해자들의 잔인함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들의 끔찍하고 도를 넘은 악행이 실제 사건에 기반하였다는 것이다. 현실은 더 심하면 심했지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문득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폭력의 주동자나 갑질 사장은 원래가 악마 같은 ‘양아치 보스’라고 치자. 그런데, 대게 그런 보스 옆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충성하는 ‘똘마니’들이 있다. 주동자 옆에서 동조하며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똘마니: (속된 말로) 범죄 집단 등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부하




단순히 친분으로 동조했다고 보기에, 이들의 충성에는 맹목적이고 비상식적인 면들이 많다. 실제로 < 모범택시> 드라마의 ‘갑질 사건’ 에피소드는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양진호 회장’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양 회장은 본인이 초록색으로 염색한 뒤, 나이 50대가 넘는 임원들에게 빨간색·노란색·파란색 등등 형형색색으로 머리 염색을 강요했다고 한다. 


언론에 보도된 양진호 회장의 갑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피해자의 뺨을 때린다던가, 기념으로 본인이 폭행하는 영상을 찍으라 하고, 직원 휴대전화를 장기간 불법도청, 해킹, 사찰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직원에게 석궁을 줘 닭을 잡게 하고, 일본도로 닭을 베도록 시켰다는 부분은 정말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생마늘을 먹이고, 강제 염색을 시키는, 이러한 '엽기 갑질'이 사내 동조자나 조력자 없이, 혼자 했을 리 없다. 일명 '똘마니'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폭력에 동조했을까? 



먼저, 그룹 내 존재하는 강압적인 상명하복 문화의 잔재일 수 있다. 학교나 회사는 군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의 명령에는 무조건 yes로 답해야 하고,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드는 것이 충성의 척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무한 충성을 보인 자에게 돌아오는 두둑한 보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더 큰 충성을 위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폭력의 수위는 점점 올라가고 양심이나 도덕적 가치는 점점 사라져 갔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엽기적이고 반인륜적인 행동을 저지르면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한두 번 횟수가 반복되고, 주변에 아무런 제재도 없다 보니, 어느새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기에 익숙해버렸을 것이다. 스스로 '나는 이래도 된다'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또한, 똘마니들의 마음에는 언젠가 본인도 강자처럼 되고 싶다는 선망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그의 사회적 지위나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며,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따라하다보면, 언젠가 내가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이러한 미성숙한 태도는 결국 무책임한 행동과 비참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힘의 주도권을 쥔 강자의 편에 섬으로써, 본인과 약자를 차별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자의 옆에 있는 동안 본인은 보호받고 있는 존재라 인식하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두려움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본인은 안도감을 느끼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주동자가 아니므로, 어느 정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켜서 한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다룬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치의 끔찍한 유대인 학살과 수많은 만행에 가담했던 평범했던 남자, 아이히만. 전범 재판대에선 그는 어떠한 뉘우침도 없이 당당히 말한다. 본인은 죄가 없다고. 단지 상부에서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우리도 누구든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고, 누군가의 '똘마니'가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은 너무 평범한 모습으로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두려움 없이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재판 참석자이자 책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의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He was simply unable to think
그는 단지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 한나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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