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중일기 8. 생애 처음으로
거의 반년 만에 부산의 부모님 댁을 찾았다. 서울과 부산의 먼 거리를 핑계로 1년에 한두 번 부산을 찾는다. 이왕이면 오래오래 있다 가고 싶다. 딸이 돈을 잘 벌어서, 고양이가 아프지 않고 예민하지 않아서 이곳저곳을 자주 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기에 딸이 차도 있고 운전도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함께다.
영도의 항구 근처에 있는 집은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모기도 같이 잘 들어오는 집이고, 내가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 이후에 장만한 집이지만, 10대일 때 쓰던 가구가 있어 낯설지 않다. 집에 물건이 계속 늘어서 탈이랄까. 어느 날은 오래된 핑크색 실내 자전거가, 어느 날은 낡은 통기타가, 어느 날은 61건반 전자 키보드가 그리고 발목을 고정해 거꾸로 매달리는데 쓰는 일명 '꺼꾸리'가 안방 침대 옆에 자리 잡았다. 다 누가 버린다는 것을 아깝다고 짊어지고 온 아빠의 수완이었다. 집에 뭔가를 쌓아두지 말라는 내 말을 듣던 엄마가 옷걸이로 쓰던 실내 자전거 위의 옷들을 치우고 슬슬 자전거를 타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면 두 분은 천생연분이 확실하다.
아빠는 뭔가를 사지는 않는데, 자꾸 얻어오고. 엄마는 자잘한 것들을 사는 취미가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필요한 것들이라 취미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하다. 진공 밀봉기라던가, 휴대용 믹서기, 미니 공기 살균기, 접이식 휴대용 세탁기 같은 것들을 어디서 보고 사신다.
그날은 엄마에게 백화점 상품권이 생긴 날이었다. 엄마 생각으로는 아빠의 여름 정장 재킷이 없어서 그걸 사주시고 싶으셨나 보다. 백화점을 싫어하는 아빠를 초밥을 먹자고 꼬드겨서 셋이 함께 백화점 회전 초밥집에 앉았다. 이것저것 나를 먹일 생각으로 앉은 자리였지만, 초밥이 그렇게 맛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보게 된 가격표는 광어 초밥 한 접시에 8,000원이 넘어가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싱싱하지도 않았는데...)가격표를 본 우리 가족은 젓가락질이 느려졌고, 계란 초밥이나 유부초밥 같은 것만 몇 접시 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자주 가는 횟집에서 싱싱한 회를 한껏 먹을 수 있는 가격 이상을 지불하고 백화점 푸드코드를 나오며 아빠를 백화점 이벤트 코너로 유인해 여름 재킷 몇 개를 입혀보려 했지만, 아빠는 한사코 거절하며 집으로 훌러덩 떠나버렸다.
엄마와 나는 쓴웃음을 마주 지으며 백화점을 조금 더 구경하다가 아빠 등산용 반팔티셔츠를 사자며 할인 코너를 서성이다가 모자 코너를 발견했다. 마치 엄마는 여름 모자 하나가 필요하다며 이것저것 써보면서 어떠냐고 엄마 특유의 '쁘'하고 웃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엄마 얼굴에서 나와 닮은 것들을 발견하며 가슴속 한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 백화점의 모든 모자는 다 씌울 태세로 이쁜 모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딸로 충실한 시간을 몇십분 보냈다. 이런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그러다 마치 나도 여름용 달리기 모자가 필요해서 스누피가 그려진 모자를 집어 들고 "엄마 나는 이거 살래." 하고 말했더니 엄마도 그 모자를 써보았다. 예상외로 엄마에게, 서로에게 잘 어울렸다. "엄마는 스누피가 좋더라."라는 말 한마디를 더해 엄마에게 "그러면 우리 이거 커플 모자 하까?" 하고 벅차게 말했다. "그르까." 하며 우리는 친구처럼 깔깔대며 디자인은 같지만, 색깔이 다른 모자를 두 개 골랐다. 엄마는 "니 하고 싶은 색깔 해. 엄마는 아무거나 쓰면 된다."라고 말했고 나는 오기가 생겨서 진초록색과 군청색의 모자를 엄마에게 번갈아 가며 씌워보며 엄마에게 더 어울리는 진초록색을 엄마 걸로 하기로 했다.
몇 년 만의 커플 모자일까. 요새는 가족끼리 커플 아이템을 하나씩 하는 집도 있던데 내가 어릴 때 엄마와 나눠 가진 것들이 있을까. 모자가 담긴 쇼핑백을 쥐고 부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와 내가, 아빠와 내가 닮은 점들을 하나하나 꼽는다.
길 가다가 꽃에 한눈파는 것은 엄마를 닮았고, 동물한테 말을 거는 것은 아빠를 닮았다. 대화 중에 갑자기 다른 주제를 던지는 것은 엄마를 닮았고, 길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는 것은 아빠를 닮았다. 집중할 때 입이 삐죽 나오는 것은 엄마를 닮았고, 긴장할 때 주먹을 쥔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은 아빠를 닮았다. 닮은 얼굴과 손가락, 발가락 말고도 이런저런 행동들이 닮은 것은 나는 꽤 오래 엄마, 아빠와 같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점은 닮고자 했고, 어떤 점은 닮기 싫어도 저절로 옮았을 것이다. 그렇게 옮은 것들을 오래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나와 같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위와 매우 가깝다.
서울로 돌아와 엄마와 나눈 커플 모자를 쓰면서 모자를 고르던 봄의 기억을 떠올린다. 왠지 오래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모자도, 기억도. 오래오래.
다음에는 아빠와 커플 템을 맞춰야겠다.
2024년 5월 9일 목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