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 이야기
밤엔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낮에는 햇빛 아래 10분만 서 있어도 땀이 흘렀다. 복도 창틀엔 축축한 공기가 내려앉았고, 아스팔트 위로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교실 창밖으론 매미 울음 대신, 희미한 바람 소리만 느슨하게 스쳐 갔다.
여름방학이 머지않았다.
삼 학년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가 막 끝나가고 있었으니까.
그 덕에 봉우리를 보지 못한 지도 꽤 됐다. 며칠쯤인지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 공백이 자꾸 손끝에 걸렸다. 무심코 연필을 쥘 때,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갈 때, 어디선가 그 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야, 이재하. 시험은 잘 봤어?”
진섭이 옆으로 와 말을 걸었다. 교복 셔츠는 소매 끝이 헐거웠고, 손에는 구겨진 문제지가 들려 있었다.
“그럭저럭. 내일이 마지막이지?”
나는 운동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 아, 진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애들이랑 축구나 하게. 왜 시험 기간엔 축구를 안 하는 거야?”
진섭은 말끝을 흐리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야, 시험 기간엔 공부해야 하니까.”
나는 가볍게 웃었다.
“역시 그런 거지?”
진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웃었다.
운동장 너머로 애들이 뛰어다녔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구름 그림자 속에서 깜빡이는 몸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지붕의 급식실, 그 너머의 하늘. 그리고, 그 애 얼굴이 어쩐지 떠올랐다. 말하자면 그랬다. 요 며칠,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한 조각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밥을 먹고, 교실에 앉고, 계단을 오르고,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 하루. 그런 하루가 몇 번이고 반복됐을 뿐인데. 그래서일까. 그 애가 없는 건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평소엔 이런 감상적인 말을 절대 하지 않던 내가, 괜히 창밖을 한 번 더 보게 되고, 괜히 이름을 마음속으로 몇 번쯤 불러보게 됐다. 물론 소리 내진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안 본 거지.
괜히 손끝을 한 번 말아 쥐었다.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그리운 기척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시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이 어색한 공백을 조금 더 견뎌야 했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멈춰 있던 생각이 그 소리에 밀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진섭은 여전히 옆에서 축구 얘기를 늘어놓으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운동장 위로 퍼지는 열기는 피부를 천천히 조여왔다. 셔츠는 등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고, 바지 주머니 안쪽은 축축했다. 운동화 끈은 느슨해져 발등 위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여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재하, 뭐 해? 가자.”
진섭이 먼저 가방을 둘러메며 셔츠 앞자락을 몇 번 털었다.
“어, 가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발자국이 운동장 바닥 위에 얕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졌다. 교문 쪽으로 향하던 중, 진섭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어깨가 가볍게 움찔했다.
“어? 쟤, 니 여자 친구 아냐?”
그가 턱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교문 바깥, 철제 울타리 너머. 햇빛에 반사된 아스팔트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양손은 허리춤에 걸친 채, 머리는 살짝 숙여졌지만 시선은 운동장 쪽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작은 숨이 들리는 듯했다. 순간, 웃음이 퍼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팔은 흔들지 않았고, 발끝은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맞아떨어졌다.
“안녕, 너 최진섭이지?”
“어? 어… 안녕.”
진섭은 말끝을 흐리며, 손에 들고 있던 시험지를 급히 가방에 밀어 넣었다.
“야, 이재하. 너 얘랑 갈 거지? 그럼 나 먼저 간다.”
조금 급하게 말을 던진 뒤, 그는 어색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우리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동시에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
“야, 이재하… 쟤 나 싫어하냐?”
“널 잘 알지도 못하는데, 싫어하고 말고 가 있겠냐.”
“그래?”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면서도 잠깐 고개를 돌려 흘겨봤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아, 우리 오늘 시험 끝났는데. 너는?”
나는 가방 끈을 고쳐 메며 대답했다.
“난 내일이야.”
“아씨. 같이 놀려고 왔는데…”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나는 웃음을 참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 친구들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그래서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야.”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녀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숨을 짧게 들이쉬고, 발끝으로 땅을 톡 치듯 찼다.
“어쩔 수 없지. 집이나 같이 가자.”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며 해를 가리자, 잠깐 그늘이 길 위에 드리웠다. 그 순간, 바람이 조금 서늘해졌다. 여름 오후 한복판인데도, 불현듯 늦봄의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몇 걸음씩. 발끝이 느릿하게 아스팔트를 밟았다.
학교 앞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나는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접힌 포장지를 천천히 풀었다. 건네줄 때 손끝이 잠깐 스쳤다. 그녀는 별말 없이 받아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들었다. 달았고, 차가웠고, 금세 녹기 시작했다.
“가방 안 무거워?”
나는 그녀의 어깨끈을 힐끔 보며 물었다.
“아, 응. 오늘 시험 끝나서 교과서 다 사물함에 넣어두고 와서 괜찮아. 이제 방학만 기다리면 돼. 아, 행복해.”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제자리에서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아무 망설임도 없는 몸짓이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방학에 뭐 할 거야?”
내가 묻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글쎄. 너랑 맨날맨날 놀지 않을까?”
그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매일매일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야겠다.” 장난처럼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가볍게 찡그리며, 입안에 물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렸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아참, 그리고 할머니 집 가야지. 나는 그거 하려고 방학 기다리는 거야.”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네.”
내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할머니.”
그 말은 아무렇지 않게 들렸지만- 어쩐지 그 웃음이, 한동안 내 안의 공기를 바꿔 놓았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짧게, 두 번.
걸음을 멈춘 그녀는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어? 영찬 오빠다.”
말끝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잠깐 손가락을 움직이며 문자를 주고받았다. 손 안에서 작은 진동음이 한두 번 더 들렸다. 그러더니, 눈금 없는 막대처럼 남은 아이스크림을 불쑥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한 웃음이 떠 있었다.
“오빠도 시험 끝나서 영화 보러 가재. 너는 어차피 공부해야 하지? 집에 가서 열심히 해라. 나 간다. 안녕!”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금세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손에 쥔 채.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헛헛한 공기만 남았다. 햇빛은 여전히 강했지만, 마음 어딘가는 묘하게 서늘했다.
혼자가 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잘게 엉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아이스크림을 받던 손, 가볍게 흔들리던 머리카락. 아무것도 아닌 장면들이 하나씩 반복되었다.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이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말하지 않아야 할까.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바람은 낮보다 차가웠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괜히 길게 느껴졌다.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 다시 걸으니, 무언가가 옆에서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녀의 얼굴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지만, 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밖에선 저녁의 여름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책상 위엔 펴둔 교과서가 있었고, 그 위로 붉은빛이 가만히 스며들었다. 글자는 흐릿했고, 대신 그녀가 돌아서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웃던 얼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손을 흔들던 뒷모습.
그걸 바라보는 일조차 이제는 조금 불편해졌다.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지 않고서는 더는 내 안에 남겨둘 수 없을 만큼.
손끝이 책장을 넘기다 말고 멈췄다. 눈은 글자를 따라가지 못했고, 마음은 같은 장면만 되짚었다. 그날, 그녀가 웃는 걸 지켜보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 감정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자라 있었다. 내가 깨닫기도 전에, 그 애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웃으면 같이 웃고, 그녀가 돌아서면 내 마음도 함께 멈춰 섰다.
어떤 말로 꺼내야 좋을까.
무슨 표정을 지으면 덜 어색할까.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부터는 삼켜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대답을, 혼자서 수없이 그려봤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따라갈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