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 이야기
다음 날 아침.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봉우리를 찾아 나섰다. 그게 무슨 급한 일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랬다. 햇빛은 부드러웠고, 거리엔 사람도, 소리도 없었다. 나는 학교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앞서 나간 시간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마음이 몸보다 먼저 도착해 버린 것처럼.
잠시 후, 멀리서 누가 걸어왔다. 하얀 셔츠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빛에 잠긴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봉우리였다. 내 발은, 정말이지, 저절로 움직였다.
“봉우리.”
내가 부르자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 안에서 내 얼굴이 조용히 흔들렸다.
“무슨 일이야?”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멈춰 섰다.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닌데,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듯 밀려왔다. 그리고 겨우-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나무들이 멈췄고, 바람도 멈췄다.
하필 그 타이밍에, 이 모든 것들이.
“뭔데?”
그 질문 하나에, 내 목소리는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말이 이상하게 느리게 흘렀다. 물속에서 억지로 꺼낸 말처럼.
“좋아해.”
말이 끝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웃음 속으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아주 부드럽게, 아주 환하게.
“나도, 재하야.”
그 한마디는,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순간 마음 어딘가가 가볍게 떨렸다. 뭔가 따뜻하게 번졌다. 그때였다. 눈꺼풀이 스르륵, 저절로 떠졌다.
“재하야!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
엄마의 목소리였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너무나 잔인하게- 눈을 떴을 땐, 입 안에 이불이 반쯤 들어가 있었다. 왼쪽 뺨엔 베개 자국이 선명했고, 오른팔은 베개 밑에서 묘하게 저릿했다. 꿈속의 고백은 어디로 사라지고, 눈앞엔 천장 한가운데 벌레 자국이 멍처럼 붙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이불을 밀어냈다. 아직 고백을 뱉은 뜨거운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엄마는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벌떡 안 일어나?! 7시 반이야, 재하야!”
꿈속 봉우리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스르륵 지워졌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아씨, 나도 고백 좀 해보자고…”
한숨이 베개 틈으로 스며들었다. 시트에 눌린 열기가 피부에 얼룩졌고, 꿈속 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분명-꿈이었다. 눈을 비비자 손끝에 꿈의 잔상이 걸렸다. 아직도 어딘가, 그 기척이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엔 구겨진 노트 한 장, 셔츠 깃에는 새벽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현실은 더 또렷했고, 그래서 더 낯설었다.
그녀가 웃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오래전부터 그 말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그 장면만은,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길 위에 발을 올렸다. 아스팔트는 이미 슬슬 데워져 있었고, 사람들 틈 사이로 어제 꿈속 봉우의 뒷모습이 지나갈 것만 같았다. 말할 수 있을까. 꿈에서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숨도 덜 쉬고, 그렇게 또박또박. 그땐 그렇게 쉬웠는데- 막상 눈을 뜨고 나니, 그 말은 꿈속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그건 분명 꿈이었는데, 마음만은 아직 식지 않았다. 끝난 줄 알았는데, 웬걸- 자꾸만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막대처럼. 어정쩡하게, 어딘가 쥐여진 채로.
시험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두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은 텁텁하게 말라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머리칼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고 셔츠는 바지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대충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는 다시 밖으로 나섰다.
손목시계를 흘끔 봤다. 그녀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서둘렀다. 골목 어귀, 그녀 집 앞 낮은 담장 기둥 옆에 몸을 기댔다. 괜히 손등의 땀을 닦거나, 주머니 안에서 손을 바꿔 쥐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햇빛은 벽돌 틈을 타고 길게 흘렀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전봇대 전깃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풀숲으로 사라졌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괜히 밀거나, 담장 틈에 난 풀잎을 건드렸다. 심장은 쓸데없이 조금 더 빨리 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마치 큰일을 앞둔 사람처럼.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왼손 손가락은 어느새 주머니 속 구겨진 종이를 꼭 쥐고 있었다. 그녀가 곧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고개를 들어 골목 저편을 바라봤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끝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오늘은 말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아니면 또-
그런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나는 괜히 한 번 기지개를 켰다. 하늘은 말갛게 열려 있었고, 나무 그림자가 담장 위로 천천히 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골목 끝, 누군가의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나는 무심한 척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운동화, 가벼운 걸음. 햇빛을 머금은 어깨 위로 그녀의 그림자가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낯익은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몇 번 언급했던, 영찬 선배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깨는 자연스레 서로 쪽으로 기울었고,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설 수 없었다. 어깨를 움츠린 채 담벼락 옆 오래된 대문 뒤로 몸을 숨겼다. 문틈 사이로 그녀가 선배의 말에 웃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그 순간, 내 안 어딘가가 서서히 식어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고, 말투는 익숙해 보였다. 나는 그 말 어디에도 닿을 수 없었고, 그 눈길 중 하나도 내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문지방의 거친 나무가 손바닥에 눌렸다. 숨어 있는 내 모습은 낮은 벽에 드리운 그림자 같았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나는 그저, 지나가는 장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