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엔 그 다정함이 낯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했던 나로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어느새 익숙해졌고, 하루 중 문득 떠오를 때마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마치 인터뷰하듯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말끝은 정확했고, 말투엔 여유보단 단정함이 앞섰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시나몬 롤이 든 종이봉투를 말없이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돌아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봉투 안쪽에는 접힌 영수증이 들어 있었고, 그 뒷면에는 손글씨로 짧은 문장을 남겨놓곤 했다.
대단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위한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게 됐다.
그는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배려라기보다, 상대의 결을 읽어내는 감각에 가까웠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내 마음의 결을 살피고,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날이면, 그날의 공기에 말을 묻지 않은 채 옆에 있어주는 사람. 책에 집중할 때면 그는 휴대폰 화면 밝기를 낮추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워했다. 그 조심스러움이 누군가에겐 어색할 수 있겠지만, 내겐 오히려 마음을 놓게 하는 방식이었다.
가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내 인생이 꽤 괜찮은 삶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깜빡 잊고 있었던 좋은 점들을 찾아내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뭐 이런 식이라면 계속 착각하고 살아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그의 다정함은 말보다 행동에 가까웠다. 나는 자주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커피잔을 돌리고만 있어도, 그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방식으로 나를 이해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 순간에도, 그는 묻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조용함 속엔 오히려 단단한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다정함은 그렇게 작고 익숙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곁에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재하와 달랐다. 남우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곤 했다. 아침에 꾼 꿈, 점심으로 먹은 파스타, 어릴 적에 좋아했던 책.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어도, 자연스럽게 조용한 웃음처럼 하루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 목소리를 기다렸다고, 오늘따라 더 보고 싶었다고, 아주 짧게.
처음,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재하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남우 씨와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던 찰나, 문득 재하가 스쳐 지나갔지만 내 마음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늘 따라붙던 저릿한 감정이, 그날은 없었다.
그 후로는 일부러가 아니라, 정말로- 정말 자연스럽게,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남우 씨는 내가 웃을 때 제일 예쁘다고 해”라고 말했을 때, 재하는 가볍게 웃었다.
“먹을 때가 아니라?” 그건 그 다운 반응이었다.
“아니. 그냥 웃을 때.”
나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우 씨는 내가 밥 먹기 전에 냅킨을 무릎 위에 올리는 걸 여성스럽다고 생각한대. 너도 그랬어?"
"글쎄. 난 늘 그렇게 먹는 것만 봐서, 딱히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남우 씨는 내가 머리 묶는 모습도 좋아해.”
“그래?”
“응. 걷다가 멈춰서 팔목에서 머리끈을 푸는 순간이 좋대.”
“그건 왜?”
그의 말투엔 질투도 없고, 궁금함도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몰라. 그냥 그렇대.”
내가 진짜로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이상하지 않냐’는 거였다. 예전엔 너도 좋아해 준 줄 알았던 내 행동들. 너도 말없이 보아주던 어떤 순간들. 그게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행동일 수 있다는 걸, 요즘에서야 처음 알게 됐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우 씨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 봐.”
말을 꺼내고 나서, 나는 괜히 머리를 긁었다. 그건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조차 확신 없는 고백이었다. 그냥, 요즘 들어 자주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
그리고, 그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들려온 그의 말은 짧고, 무던했다.
“그렇구나.”
여전히 감정은 숨겨져 있었고, 말투는 평온했다.
그 짧은 한마디가 끝났을 때,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정말, 끝이 났다는 걸.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내가 드디어, 마음을 정리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걸.
창가에 기대어 놓은 커튼 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기척 없는 밤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