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그 여름의 시작(2)

재하 이야기

by 이랑

“재하야, 오랜만이다.”

봉선 누나였다.


“응, 누나.”

“이제 내년에 고등학생 되는 거지? 키 많이 컸다-”

“그런가.”


봉선 누나는 고등학생이 된 뒤로 잘 마주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 시험, 무슨 모임. 언제부턴가 석진이 형도 누나와 시간을 잘 맞추지 못했고, 나도 더 이상 누나가 집에 들를 거란 기대를 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만난 봉선 누나는 여전히 예뻤다. 익숙한 냄새, 여름 햇살 아래 살짝 그을린 팔, 그리고 말할 때 살짝 흔들리는 목소리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아, 재하야. 부탁 좀 들어줄래?”

누나는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매며 말했다.


“오늘 학교에서 받은 책인데, 혹시 봉우 만나러 우리 집 가는 김에 내 방에 좀 놔줄래? 나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알겠어.”


책을 받아 들고, 그녀의 집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 덥다. 숨이 달라붙는 날씨였다. 바닥이 데워져 있고, 바람은 그저 뜨거웠다. 봉우리 집에 들렀다가, 같이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자고 해야겠다. 괜히- 그 애 얼굴이 떠올랐다.





“야, 봉우리- 안에 있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돌려보니,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얘는 집 문을 잠그지도 않고 어딜 간 거야.


현관 신발장엔 그녀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밖에 나간 건 아닌가 보다. 들고 있던 책을 봉선이 누나 방 책상에 올려두고, 조용히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책상 앞 의자에 살짝 앉아, 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잔잔한 숨소리. 헝클어진 머리카락. 가늘게 움츠린 어깨.

아무 방어도 없는 얼굴이었다.


“야, 봉우리. 일어나 봐.”

발끝으로 다리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야, 일어나.”


미동도 없었다.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까, 그냥 갈까. 고개를 돌려 책상 쪽을 바라봤다. 줄을 맞춰 쌓아 둔 교과서와 공책, 필통 안에서 삐죽 솟아 있는 연필들. 모서리가 닳은 노트 몇 권, 그리고 사진이 끼워진 액자들. 어릴 적 봉선 누나와 그녀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


작은 얼굴들, 닮은 눈웃음, 반쯤 감긴 눈동자 속에 여름 햇살이 스며 있었다. 그러다, 액자 옆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양갈래 머리를 묶고, 입을 꼭 다문 채 찡그린 얼굴.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말하지 않아도 그 아이가 누구인지 쯤은 알 것 같았다. 딱 봉우리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사진을 손에 들고 한참 바라봤다. 손끝에 엷은 먼지. 사진 끝이 살짝 접혀 있었다. 이상하게- 그 순간, 그 사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지갑을 꺼내 사진을 속에 넣었다. 아무 말도 없이. 어떤 이유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잠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날 이후로, 그러니까 그녀가 내게 몸을 붙여오고, 그것이 불편했던 그날. 그 날이후 이상하게 그녀를 보면 가슴이 자꾸만 벌렁거렸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마음은 뒤늦게 따라왔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내 숨은 더 짧아졌고, 그녀가 가만히 있을수록, 내 안은 더 요동쳤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뺨 쪽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거의 닿을 듯 말 듯, 그 사이의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한 번, 크게 뛰었다.


그 순간-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겁을 먹었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머릿속은 눈부시게 하얘졌다. 요즘 자꾸, 더위를 먹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처음 겪는 낯선 감정들이 몸 안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부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색색거리는 숨, 땀에 달라붙은 앞머리, 살짝 벌어진 입술. 눈은 감은 채, 아무것도 모른 얼굴이었다. 가슴이 말도 없이 요동쳤다.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들어찬 공기가 너무 뜨겁고, 너무 가까웠다. 어디부터가 내 숨이고, 어디까지가 그녀의 온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손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무릎 위에서 움찔, 떨리다 손등이 무릎을 밀어냈다. 이유도 없이.


심장이 두 번 크게 뛰었다. 그다음 순간- 나는 이미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도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이 다음으로 미뤄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성은 한참 멀리 있었고, 몸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잠시 숨이 멈췄다.


입술이 그녀의 뺨에 살짝 닿았다.

‘… 촉.’ 아주 작은 마찰음이 귓가를 스쳤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머릿속이 번쩍, 하얘졌다. 입술이 떨리고, 손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열이 차올랐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가슴은 엇나간 방향으로 거칠게 뛰었다.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벅찼다.


“야, 이재하.”


그 순간, 또 한 번 심장이 위로 튀었다. 숨이 목에 걸린 채 내려가지 않았다. 설마-하며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렸다. 먼저 그 애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고르며 자고 있었다. 눈썹도, 손끝도, 미동 하나 없었다.


조금씩 고개를 돌리자, 문틈 사이로 들어온 여름빛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봉선 누나였다. 팔짱을 낀 채, 입가에 반쯤 접힌 웃음을 걸고 있었다. 뭐랄까… 모든 걸 이미 본 사람의 얼굴.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누, 누나… 아니, 그게-”

“쉿.”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가져다 댄 누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봉우 깨겠다. 잠깐, 내 방으로 와봐.”


그녀가 먼저 돌아서자,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뒤를 따랐다. 현관까지 맴도는 선풍기 바람이 피부에 닿았지만, 식혀주진 못했다. 누나는 방에 들어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나는 문을 닫고서,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의자 옆에 서 있었다. 잠깐의 침묵. 선풍기 소리가 멀리서 웅웅 울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방 안 벽을 보았다. 천천히, 시선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손이 옷깃을 괜히 잡았다 놓았다.


“방금…”
누나가 입을 열었다.
“그거, 무슨 상황이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숨어 있었다. 장난 같기도 하고, 진심 같기도 한.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게… 나도…”


말끝이 흐려졌다. 손은 무릎 위에서 엉거주춤 꼬였다.

누나는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 봉우 좋아하는구나.”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뱉었다.
“… 그냥, 잠든 얼굴 보고 있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앞이 가물거렸고, 목덜미에서 등 아래로 천천히 열이 퍼졌다. 누나는 그걸 다 보고 있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눈으로.


오히려 한동안 말없이 나를 보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게, 그거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응?”

“좋아하는 감정. 그냥, 나도 모르게 그러게 되잖아. 처음엔 다 그래.”


그 말이 방 안에 가라앉자,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선풍기 소리, 창밖의 자전거 바퀴, 그리고 아직도 잠들어 있을 그녀의 숨소리.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다시 치받았다.


그녀의 말에- 무언가를 들킨 듯, 속이 다 드러난 듯했다. 그게 부끄러운 건지, 무서운 건지, 아니면 그냥… 처음이라 그런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게 정말 그런 감정이 맞는 걸까. 진짜 ‘그런 마음’이라 인정해도 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 누나, 근데…”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알겠어. 봉우한테는 당분간 비밀로 해줄게. 대신, 다음부터는 몰래 그러는 건 안 돼.”


그 말투는 혼내는 것도,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네 마음을 알아라는 듯, 조금 다정하고 조금 가벼웠다. 나는 어쩐지 그 말에 긴장이 풀렸다. 숨이 가벼워졌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 고마워.”




봉선 누나의 방을 나와, 다시 그녀의 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방 안은 달라진 게 없었다. 공기도, 불빛도, 그리고 그녀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이불 위에 얹힌 손끝,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가는 숨. 모든 게 그대로였다. 잠든 얼굴은 이상할 만큼 평화로웠다.


봉우 좋아하는구나-

봉선 누나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떠올린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저절로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사실임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은 가볍지도, 얕지도 않았다. 모를 때보다 알고 나서 더 또렷해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반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꺼내도 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이 순간, 이 거리를 오래 붙들고 싶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공기를, 흩어지기 전에 붙드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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