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샌드. 요즘은 롯샌으로 이름을 아예 바꾼 연두색 갑의 과자. 나보다 세상에 먼저 태어난 이 고전과자는 헌혈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이전에 안 먹어본 건 아니다. 인상적이지 않았을 뿐.하지만 헌혈의 집에서 만난 롯샌은 달랐다.
걸어서 동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생이 되고 전철을 자주 타기 시작했다. 역 출구 계단을 내려올 때면 창 밖으로 헌혈의 집이 보였다. 헌혈의 집이 있던 건물은 꽤 커서 1층에는 가게들마다 내놓은 스탠딩배너들로 복잡했다. 온갖 유행어로 도배된 룸카페, 보드카페, 술집, 음식점 배너들 사이로 "사랑의 실천, 헌혈" 배너는 묵직했다. 점잖아서 눈이 갔다. 그 옆 배너에는 그 날의 혈액보유량을 관심/주의/경계/심각으로 구분해 보여주고 있었다. 자주 오가는 길이라 매일 혈액형별 보유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혈액보유량 근황을 너무 잘 알게돼서 그랬을까. 헌혈이 마음에 부담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 혈액형보유량이 부족하다고 알림이 뜬 날이면 뭔가 해야할 일을 미룬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사실 헌혈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헌혈을 한다고 일상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니고, 채혈도 1시간채 걸리지 않았다. 그저 내 결심만 서면 되는 일이었다.
결심이 섰던 어느 날 헌혈의 집을 찾았다. 문진부터 채혈까지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문진결과 역시 난 건강했고, 320ml의 혈액은 10분채 되지 않아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데, 그 가치에 비해 나의 수고는 작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채혈이 끝나고 영화티켓과 롯샌을 건네주셨다. 피를 뽑아서 그런지 괜히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평소라면 먹지 않았을 연두색 봉지를 까서 롯샌을 하나 물었다.
헌혈 후 먹는 롯샌의 맛은…끝내줬다. 단단한 쿠키와 그 사이로 적당히 샌딩되어 있는 달콤 상큼한 파인애플 크림의 조합이 맛으로나 식감으로나 훌륭했다. 씹을 땐 단단한 쿠키가 입안에 들어가자 부드럽게 녹았다. 파인애플 크림은 쿠키와 잘 어우러졌다. 자주 먹는 과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파인애플의 이국적인 맛과 향이 더 독특하게 느껴졌다. 파인애플향이 이렇게 상큼했던가. 풍부했던가. 모양도 맛도 화려한 과일, 파인애플의 위력을 체감했다. 파인애플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존재감을 남기는 과일이라는 걸 이 날 처음 느꼈다. 고작 0.19%로 과자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니. 성분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밀가루일텐데. 앉은 자리에서 하나, 두개, 세개를 먹다가 결국 한 봉지를 다 먹었다.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다른 과자들도 있었지만 롯샌 한 봉지면 충분했다. 롯샌 효과 덕분인지 빈혈없이 씩씩한 걸음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보름에 한번 헌혈의 집을 찾았다. 헌혈을 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롯샌을 먹고 지혈 밴드를 풀고 집으로 가는 게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헌혈 후 집에 가는 발걸음은 늘 가벼웠다. 경쾌했다. 뿌듯한 마음 덕이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데 뿌듯했고,기뻤다. 별로 수고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떤 이의 생명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의아하면서도 보람차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돌아보면 그 때 느꼈던 마음은 행복감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도울 때 느끼는 충만한 행복감. 그리고 그 뿌듯한 순간에 롯샌은 달콤한 회복제였다.
이사를 가면서 동선에서 헌혈의 집이 없어지고, 코로나로 인해 헌혈을 한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롯샌을 만나면 헌혈의 집이 생각난다. 선의를 품고 작은 용기를 내 행복을 느꼈던 그 날들이 떠오른다.
“요즘도 용기내서 해보는 선한 행동이 있어?” 이 과자는 내게 질문하는 것만 같다. 좋은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여전히 갖고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