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말기 암환자인 시아버지와 함께한 나의 6개월
당장 내 앞에 죽음이 드리워진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때, 뼈가 저리도록 깨달은 사실 하나는
나는 당장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빚이 있는
'채무자'였고 그 빚을 제대로 갚지 않고
삼도천 건너는 배에 몸을 싣게 된다면
남은 사람들에게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는 것이었다.
맨 첫 글에서 언급했듯이 빠른 86년생, 소띠인 나는
04학번, 19세가 되면서 학자금 대출로 채무자 인생을 시작했다.
매달 출금 내역에 대출 상환금이 빠지지 않았고
첫 월급에서 저축을 할 수 있는 돈은 없었다.
하지만, 39년생인 시아버지는 달랐다.
시아버지가 태어난 해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시아버지가 6살이었던 1945년에는 해방이, 11살이었던 1950년에는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렇게 유소년기를 보낸 시아버지가 성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곳은 한 특수강 회사였고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4남매의 대학 등록금까지 책임지셨다.
돈은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자 업적이었고
'한강의 기적'의 주역이자 '하면 된다'라는 것을 몸소 겪고 실천한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그와 나의 간극은
죽음 앞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섬망 증세가 잦아든 시아버지는 나를 그의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본인이 가져온 짐 중에
통장이 어디 있는지, 비밀번호는 무엇인지, 도장은 어디인지 알려주셨고
어느 통장과 카드들을 어떻게 정리하면 되는지 알려주셨다.
본인의 마지막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 대한 정리를 맡기고 싶었던 것 같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를 남편에게 해주었더니
남편은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자신에게도 안 해준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었냐며
'엄마도 아버지 통장 비밀번호 몰랐을낀데 너한텐 알려주네'라고 했으니.
그 얘기를 들으니 왠지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강한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또 누구보다 본인의 자식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라는 것도 알기에
나에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시아버지의 상황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통장과 도장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속상했던 건 시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었다.
헤질 대로 헤지고 낡은 대로 낡은 그 가방 안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통장과(기장이 다 끝난 것도 모두 모아 두신 것이 귀여운 모먼트)
매년 본인이 점점 약해지신다며 본인이 혹시 갑자기 잘못 됐을 때
재산 정리는 아들에게 맡긴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4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새로 써서 넣어두신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담담하게 준비를 해오셨다는 생각에
나이를 들면 저절로 이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
그리고 얼마나 쓰실지는 모르지만 깨끗한 가방에 넣어 두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깔끔한 가방 하나를 마련해 그곳에 넣어두었다.
섬망이 잦아들고서는 아주 어려운 점은 없었다.
남편이 회사에 양해를 구해 조금 늦게 출근을 했고
시아버지가 입원한 지 4일 정도 지나 주말이 되니
멀리 지방에 사는 큰 시누가 주말 이틀은
병원에 대신 있어 주어 우리 부부 모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만, 큰 시누가 있는 동안 소화기내과 협진이 잡혀있었고
협진 때, 확인할 내용을 메모해서 남겨두고 왔지만
협진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원 이후로 예약을 해서 진료를 봐야 했다.
왜 일정까지 잡아놓은 게 어그러진 건지 모르겠고 아직도 궁금하지만
며칠 만에 방문한 외과 병동에서 선생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전해 듣기론
소화기내과 교수님이 외과 병동으로 직접 왔는데 당시 환자와 보호자 모두 진료를 안 받겠다고 했고
소화기내과에선 왜 헛걸음시키냐며 외과 레지더트 선생님에게 싫은 소리 겁나 했다고 한다.
잘생기고 친절했던 외과 레지던트 선생님이라 유난히 더 미안했던 기억...)
그렇게 열흘 넘게 병원에 계시다 시아버지는 퇴원을 하셨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곧 우리 집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내 가방이 없어졌다'라는 시아버지의 말과 함께.
당황한 남편과 나는 새로운 가방을 드리면서
말씀하신 대로 정리했다고 설명해 드렸지만
가방을 열어 본인의 물건이 무사한지 확인한 뒤,
나를 바라본 시아버지의 눈빛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도둑을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감히 니가 여기다 손을 대?
라는 말을 눈빛과 표정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일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아무리 마음이 약해지고 생각이 흐려져 본심이 아닐 거라고
위로하는 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양심껏 살아온 내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흘렀다.
착하고 곧은 심성 가지신 부모님 밑에 자라며
나쁜 짓, 남에게 피해 주는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당장은 좌절하고 슬퍼할지언정
곧 털어내고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양심이자 성실한 삶의 자세라는걸.
이런 자세는 누구에게나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알게 되었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 또한
나이를 먹으며 체득한 내 신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가방 사건으로 내 신념은 한순간에 부정당했고
그것이 나를 좌절케 했다.
만약 내가 진짜 돈을 생각했다면
기존에 내가 받는 연봉을 일수로 계산해
함께 지내는 날짜를 급여로 계산했겠지.
스트레스에 따른 추가수당도 요구했을 거다.
아니 그 전에 계약서 작성부터 했겠지.
그깟 통장 비밀번호 알려주든지 말든지
나에겐 1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80년 넘게 사신 분이 진짜 모르셨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명확한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아주 잘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방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반복하던 시아버지는
그 이후 시집살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기엔 유치한
심술 비슷한 일들을 시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