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와 빗자루질.
그렇게 냉대와 무시를 받으면서 나는 점점 입을 닫아가고 있었다.
미생의 한석율이 사내게시판에 사수에 대한 고발글을 올린 뒤 그의 신상은 까발려졌고 버르장머리 없는 요즘 애들로 낙인 찍히면서 한석율은 말을 잃어간다.
나는 그 에피소드의 임시완 나래이션을 잊지 못한다.
그는 말을 잃었고 우린 그를 잃었다.
나 역시 상사들 사이에 내 평가가 어떤지 알게 된 이후
확연하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회사에 있는 시간은 침잠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연락 온 회사 중 한 군데 선택했고 그저 이렇게 보내기엔 아까운 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민을해도 어찌됐든 1년을 버티자는 것이었고(1년을 지내야 퇴직금이 생기기에) 최선을 다해 막내노릇부터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고려청자를 빚어내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면
마당을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나 마찬가지니
나는 그저 한 단계씩
매일 성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웹에이전시의 기획자로 입사를 할 때, 사람들에게 많이 받았던 질문은 굳이 왜 '을'의 위치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대행사의 기획자야말로 전문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라이언트가 대행사를 찾는 이유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의 체계성,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50%정도 가지고 있지만 신입사원 시절 나는 120% 확신에 가깝게 영역을 막론하고 대행사의 기획자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전문적인 기획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조금의 팁이라도 더 얻기 위해 시니어기획자들의 블로그를 검색하고 또 검색했고 필기하듯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빼곡히 모았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나의 클라이언트는 대행사의 기획자를 단지 오퍼레이터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회사 안에서 난 본의 아니게 여유있는 사람이 되었다. 또. 역시나. 내가 견딜 수 없는 그 이유로 귀결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도망갈 곳은 없었고 나는 내가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제일 어려워하거나 약한 부분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숙명적인 때가 있다. 대게 그런 숙명적인 순간은 반대형태로 올 때가 많아 사람을 늘 미치게 만드는데 나같이 업무를 통한 성취의지가 높은 이에겐 업무 자체가 주어지지 않거나 워라밸이 중요한 사람에게 업무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악덕한 상사도 있다.)
나에겐 그것이 전자였고 나름대로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피한 것이 아니었다. 견뎌야 할 숙명이었기에 직면해야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억울한 오해도 풀어야만 했다. 난 물냉파와 비냉파의 호불호를 쉽게 무시할만큼 막무가내는 아니라고. 그렇게 무개념은 아니라는 점을 어필해야만 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열심히 했다.
그 결과, 한 달은 커녕 채 3주가 지나지 않아 나와 제일 친숙한 사내 비품은 문서 제본기였고 한달반정도가 지났을때는 프린트 드라이버 설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나는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