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날 죽이려고 했어요?
사실 난 첫 회사에서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신입사원이지만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새우고 일을 하던 그 시간보다 멍하게 앉아있던 2개월이 더 힘들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만큼.
그저 1인의 몫을 하고 싶었고 그 몫을 아직 해내기에 부족하다면
지난 자료라도 보면서 혼자 뭔가 알아가고 싶었지만 사내 서버조차 구축되어 있지 않았던 회사에서는
웹서핑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월급루팡이나 하고 싶다는 말이 있지만 강제적으로 주어진 월급루팡 자리는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두어달의 시간이 지나고 사수를 만나 몰아치는 일들 속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새로온 사수 덕분이었다.
사수는 나 때문에 더 힘들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배워가며 일할 수 있었고
언젠가 그가 많이 컸다며 뿌듯해하던 칭찬을 받은 날은 다이어리에 별을 몇 개나 그리게 한지 모를만큼 기뻤었다.
하지만 사수는 4-5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고(그만큼 어수선한 곳이었다)
나 역시 미련하게 한 곳만 고집하는 건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회사를 다니며 이력서를 냈다.
3군데 정도 지원한 것 같은데 2군데에서 면접 제의가 왔고 2군데 모두 입사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둘 중 한 회사로 이직을 했다.
내가 신입일 때가 벌써 10여년 전이니 많이 변했겠지만 하나의 팁 아닌 팁을 주자면
신입이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직을 해야할 때 짧은 경력이 흠이 될까 숨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이직을 준비하는 것을 아는 지인들 중에도 경력란을 비우는 게 어떠냐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10개월이라는 애매한 경력을 삭제하지 않았고 면접장에 가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몸 담았던 회사의 뒷담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직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향점을 어필하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구직자가 주눅 들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간혹 압박면접이라는 미명하에 가시돋힌 역질문으로 기선 제압을 하려는 면접관의 태도에
상처 받을 필요도 없으며 그 질문에 답을 할줄 아는 것, 혹은 아닌 것이 능력의 유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그렇게 입사한 회사에서 면접에 들어와 나를 뽑았던 분들에게
나중에 직접 들은 바로는 면접 본 사람들 중에 내가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어서 뽑았다고 했다.
다만 운이 나쁘게도 같은 날 입사한 다른 사원들과 다르게 업무 분담에 있어서
나에게 득이 될만한 업무를 받지 못하였고 (당시 나는 웹기획자였음)
여러 진상 담당자들을 만나며 몰래 화장실에서 우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윗 사람에게 덜 혼나는 방법은 그저 내가 입을 다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생의 중반을 지나 입을 다물게 된 한석율의 모습에 가끔 나는 울컥한다.)
그렇게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직을 한 뒤 나는 1년을 20일 앞둔
11개월 열흘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과장 1명, 대리 2명으로 진행되던 프로젝트의 인원이 교체되면서
과장 1명, 사원인 나 1명이 인수인계를 받게 되었는데 인수인계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고
프로젝트 PM이자 나의 사수는 그 와중 일주일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웠다.
물론 휴가 중에 꼬박꼬박 전화는 받아 주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욕도 함께 했지만.
그리고 업무 리스트에서 누락된 업무 중 하나를 챙기지 못해 그 책임을 내가 지게 되었다.
과장은 분명 나에게 몇 번이나 노티를 주고 강조했다고 했지만
내 메일함 어디에도 그가 강조했다는 누락된 업무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챙기지 못한 나의 실수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 혼란한 와중에 입사한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사원 한명을 놔두고
휴가를 꼭 가고 싶었는지.
그 바쁜 시즌, 단 2주 후에만이라도 늦게 가줄 순 없었는지.
지금 그의 나이와 직급이 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갔을 것 같은
그 휴가를 그는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나를 그렇게 미더워하지도 않았으면서)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