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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국 Mar 06. 2021

프로이직러의 탄생기.

첫 회사는 3년을 다니고 싶었다.

본의 아니게 프로이직러가 되었습니다.(1)



2009년? 그즈음부터 내 삶은 조금 고단해졌다.

아버지가 15년 가까이 경영하던,

그 악명높은 IMF도 이겨낸 훈장 같았던 사업장은

생뚱맞게도 태평양 건너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아주 화려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것처럼 

빨간딱지가 곳곳에 붙어있고

당장 나가라는 소리에 주저앉아 우는 그런 장면은

우리의 채무가 사채업자의 선까지 닿지 않아서 

연출되지 못한 것인지 모르나

내가 체감한 채무자로서의 몇 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법 테두리 안에서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무례하게 

굴 수 없고 또 그렇게 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카드 대금 독촉을 위해 집으로 찾아오는 행위도 

정해진 시간 이전•후로는 할 수 없다.


내가 겪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당시 내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애로 보여서 

그런 건지 추심을 하러 오신 그 분들은

아주 젠틀하게 "안 보이는 곳으로 붙이고 갈게요."라고 

말하며 정말 안 보이는 곳에 소위 말하는 빨간딱지,

정식명칭인 압류물 표목을 붙이고 가셨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 가족은 거의 모든 짐을 처분 

아니 넘기고? 버리고? 이사했다.

좁은 집으로 가는데 넓은 집을 채우고 있던 짐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후 나의 삶은 본격적인 롤러코스터 운행에 들어갔다.

아직 졸업이 1년 반 정도 남았기에 아침엔 근로장학생으로 수업 후엔 학원강사 or 과외,

그리고 밤엔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전문점과 

편의점 등에서 24시간 같지 않은 24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11년 2월 졸업 예정인 나는 11~ 12월경부터 

인턴, 계약직 가리지 않고

신입을 뽑는 곳이면 모두 지원했다.


사실 취업 준비(이름 들으면 알만한 중견기업 이상의 

회사에 취업하기 위한 준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게 성인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비용으로 계산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최소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앞서 언급한 상황 때문에 난 경제활동을 해야 했고 

빠른 취업이 필요했기에

아니 그보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때의 난 

토익시험을 볼 돈이 없었을뿐더러

토익시험에 들어가는 비용이 아쉬웠기에

이러나저러나 돈이 아쉬운 난 어느 곳이든 빨리 취업해서 

능력을 갖추고 싶었다.


얼른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어서 필요한 모든 곳

(월세, 공과금, 학자금 대출 등)에 급여로 받은 돈을 

모두 쓰고 딱 20만 원만 내 손에 남을 수 있는 

안정에 이르길 원했다.

그 20만 원으로 한 달에 한두 번쯤 

동생에게 치킨을 사줄 수 있다면,

아빠에게 담배 한 보루를 선물 할 수 있다면,

엄마의 기초 화장품을 걱정 없이 채워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토익점수가 없으니 중견기업 이상 큰 규모의 회사에는 지원할 수 없었고

전공과 관련된 전문분야로 지원을 하려고 보니

좁은 분야에서는 이름 있는 회사들은 정해져 있어 

나름대로 경쟁이 치열했다.

하찮은 스펙이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공을 들인 

자기소개서와 학교에서 부지런히 생활한 몇 가지를

 모아 모아 채워 넣으니 몇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긴 했지만, 

면접 멘토링 등으로 다져진 경쟁자들 사이에 나는 초라했고 

불합격 문자 받는 것이 몇 번 반복되자 조금씩 상처받기 시작했던 것 같다.


1월생인 나의 생일은 한창 추울 때인데 생일날 본 면접은 

10년이 지났지만, 그날 날씨까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몸도 마음도 정말 추웠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13: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통과한 

한 재단의 1차 논술 시험 후 고배를 마신 2차 기획안 제출 및 면접에서 기획안 평가를 겸한 면접을 보게 되었을 때 더는 상처받기 싫다, 아무 데나 들어가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아무 데나 들어갔다. 소위 말하는 ㅈ소에.

신입사원이지만 바로 실무를 담당해야 하는 그런 회사에.

입사한 지 갓 3개월이 지난 내가 2박 3일 동안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쪽잠을 자며 제안서를 쓰고

오전엔 회사 인감을 들고 컨소시움을 맺은 업체에 들러

 계약서에 날인을 해야 하는 회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지며 다행이다 싶은 건

 월급이 제때 칼같이 나왔다는 것.)


돌이켜 생각하니 헛웃음이 절로 난다.
팩트는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이었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이것이 정상적인가
생각을 했던 나는 당시 너무 순진했고
회사의 막내인 나를 제외한 모든 어른은 
비겁했다는 것이고
그 시간에도 의미부여를 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몸부림은 꽤 처절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회사에 입사할 때, 분명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기시감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조상님들의 말씀은 가뿐하게 넘겨 버린 채

 못 먹어도 go라는 생각으로 돌진했다.


왜 그때의 나는 한 달만 더 기다려볼까라는 조금의 여유조차 부리지 못했을까.

나는 돈이 급하기도 했거니와 돈을 벌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 어른이 된다는 것을 모른 채.


그렇게 나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회사에서

일없이 멍하니 내버려 지기를 두 달 가까이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쯤, 

바로 실무에 투입이 되어선 욕먹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선임들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컵 씻기부터 바닥 청소까지 모두 도맡아 하는 짓을 

10개월 가까이하고 퇴사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근무 전날까지 그들은 나에게 같이 일하자 함께 한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 이야기했지만

마지막 근무 날, 장염에 걸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출근한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첫 직장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인생의 중요한 지점 앞에서 발휘하는 인간의 직감은 꽤 정확하다는 것과

스트레스성 장염은 실제로 존재하는 병이며 당장 눈앞을 하얗게 만들다가 또 까맣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퇴사 후 딱 하루를 쉬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게 된다.

프로이직러 탄생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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