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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Feb 02. 2025

당신의 선택은

짧은 이야기(소설)

터벅터벅, 사람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걸었다.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걸까?’


문득 든 궁금증에 나란히 걷던 낯선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얼마나 가야 도착하나요? 저기요?”

나는 축 늘어져 있던 긴 팔을 간신히 들어 올려서 옆에 선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멍하니 걸어갔다.

혼란스러웠다.

남자의 눈동자는 꼭 죽은 사람처럼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멍하니 걷고 있는 사람들만 보였다.

“저기요!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한 번 더 불러볼 요량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그냥 두세요. 절대 쳐다보지 않을 테니까요.”
“으악!”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놀라요?”
“... 갑자기 말을 거니까요.”
갑자기는 아닌데. 나 오래전부터 당신들을 불렀어요. 이제 겨우 반응을 보이나 했는데 생뚱맞게 다른 사람한테 아는 척이나 하고.”

오래전부터 우리를 부른 사람이라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는 낯선 남녀가 내 옆의 남자처럼 생기가 없는 눈동자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또 다른 낯선 여자가 나를 향해 방긋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워요.”

그녀의 눈동자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밤하늘보다 짙은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내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나는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에 완전히 홀린 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향해,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멈추면, 우리 다 무너진다고요.”

그녀가 말하는 동시에 바로 뒤에 있던 남자 하나가 나의 팔에 걸리면서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움직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분이 호기심이 대단하네요. 가던 길 계속 가세요. 저도 따라가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왜 이렇게 민망한지, 괜스레 콜록거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저도 몰라요. 저도 당신처럼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무척 당황했거든요.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니까요.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나는 반응이 없었던 옆 남자를 떠올리고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당신을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 내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서 계속 소리 지르고 있었어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내 목소리에 반응을 잘 보이는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나를 부르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이 왜 이렇게 섭섭한 지. 나는 안 보는 척, 눈동자만 살짝 굴려서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반월로 접히며, 나를 반긴다.

또다시 멍해진 내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황급히 앞을 보라고 손짓했다. 꼭 어린아이가 장난치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해져서 괜스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세요?”
“당연히 모르죠. 그런데 왠지 이 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내가 왜 낯선 사람들의 뒤만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던 거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오랜 기다림 끝에 이 행렬에 합류했다는 벅찬 감정이 몰려왔다.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지나가네. 휴”
“네?”

그녀의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도 무심히 고개를 젖혔다.

"아"


누군가 훨훨 날아서 우리의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보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것처럼 거리낌 없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저들은 빠르게 맨 앞으로 가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그렇네요. 그런데 우리도 그렇지 않아요?”
“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곳까지 오게 된 것만 해도 선택받은 것 같아요. 심지어 우리는 주위 사람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고 있지도 않잖아요.”
역시!”
“네?”
“그래서 당신만 내 목소리에 반응했나 봐요. 신기했거든요. 주위 사람들 중 가장 무기력하게 보여서.”
“제가요?”
“네. 당신 옆에 있는 그 남자보다 당신이 더 축 늘어져서 걸어가고 있었어요. 당신이 반응을 보였을 때,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역시, 이유가 있었군요.

큰 소리로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우리가 있던 좁고 긴 공간에 서서히 울려 퍼졌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 때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 있나요?”,“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한두 사람씩 드문드문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순식간에 웃음을 멈췄다. 우리 말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있다고? 그녀와 나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봤다.

“어머, 우리 말고도 또 있나 봐요.”
그러게요. 신기한데요.”

비록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목소리로 서로의 존재를 알리며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
“왜요?”

깜짝 놀란 내 목소리에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제 다 왔나 봐요.”
“네?”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줄의 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점점 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줄의 끝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누가 서 있는데요?"

웬 낯선 이가 줄의 끝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낯선 이는 한 사람씩 자신의 앞에 세우고 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고,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낯선 이가 다가오는 순간, 갑자기 공중에서 누군가가 사뿐히 내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 우리 머리 위를 날아서 지나가던 이들이구나.’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걸음 물러섰다. 낯선 이가 공중에서 내려온 이를 향해 무언가를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 기이한 느낌이었다.

"뭐야? 사라졌잖아?"

기이한 느낌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찰나에, 공중에서 내려왔던 이가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낯선 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뒤에서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낯선 이가 다가오는 순간 모든 것이 차단된 것처럼 더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어떤 둥근 돔 형태의 넓은 건물 안에 낯선 이와 단둘이 마주 섰다.

‘자, 선택하세요.’
“선택이요?”

낯선 이는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낯선 이가 오른팔을 길게 뻗어 내 왼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

그곳에는 지금까지의 내가 있었다!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며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익숙한 곳, 편안한 곳, 원래 내가 있었던 곳. 나는 그곳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순간 든 두려움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가려면 어둡고 컴컴한 구석 한편에 자리한 길게 이어진 계단을 이용해서 내려가야 하는데, 계단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온 것이다. 걸음을 멈춘 나는 다시 낯선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내 오른쪽을 향해 가리켰다. 다시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

둥근 돔 안의 오른쪽 벽면 유리창 너머로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질렀다. 지금 있는 곳이 높은 건물의 꼭대기인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하늘 아래로 녹색의 푸른 잔디와 눈이 부실 정도로 백색의 빛을 발하는 반짝이는 푸른빛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보는 순간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저곳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오른쪽 벽면은 거대한 통유리로 완전히 막혀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유리창을 깨고 창 밖으로 뛰어내려야 하는 건데.

혼란스러워진 나는 낯선 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선택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굳은 결심을 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유리창을 향해 뛰어들었다. 유리가 깨질 것을 대비해서 두 팔을 크로스로 만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다쳐봤자 얼마나 다치겠어? 우선은 시도해 보자고!

“뭐야? 유리가 아니잖아?”

유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얇은 막처럼 내 몸에 닿기 전에 사뿐히 들어 올려졌다. 나는 하늘을 훨훨 나는 자유로운 새가 된 것처럼 평화로운 녹지로 부드럽게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재빨리 좀 전까지 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둥근 돔이 눈부신 하늘과 대비되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였다. 꼭 어느 지중해 연안, 햇살 반짝이는 날, 해안가의 멋들어진 등대를 보는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내려온 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연의 바람을 느끼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좀 전에 내 앞에 서 있었던 이도 가까운 곳에서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한없는 평화가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그랬구나.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해 그 긴 줄을 끊임없이 걸었구나. 맞다. 그녀는?”

나를 깨웠던 그녀. 그녀도 이곳으로 와야 하는데. 그녀를 생각하는 순간, 실크처럼 부드럽게 펄럭이는 옷깃 하나가 바람과 함께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멈추는 곳, 그곳에 밤하늘보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해맑은 미소로 있는 힘껏 그녀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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