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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경 Nov 08. 2024

철새에게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그때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의 출근을 돕고 등교 준비를 한다. 아이들의 옷을 찾아 입혀 주고 양말도 신긴다. 스스로 입은 아이는 가방에 넣어줄 것을 챙긴다. 일찍 일어나는 날은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핸드폰으로 사건사고를 확인한다. 아침을 열었던 내 집에서 아이들과 남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나면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무작정 길을 걸었고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때로는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직장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주부의 일상은 출근도 퇴근도 없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남편이 출근하는 시간부터 주부의 삶은 잠시 퇴근하는 건지도 모른다. 정해진 학교의 시간을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다.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해진 집에서 나는 무얼 했던가 청소하고 나면 힘이 들었다. 깨끗한 집은 잠깐 나의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지만 밖으로 나가기에는 이미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을 보내고 집안을 청소하지 않기로 했다. 산책을 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치우지 않은 집은 마음도 몸도 디딜 곳이 없었다. 다시 집을 청소했다.


주부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엄마인 나는 널브러진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에 돌리고 마른빨래를 개서 넣어야 했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지 않으면 마땅히 입을 옷이 없고 그렇게 되면 남편과의 마찰이 생기곤 했다. 청소와 빨래는 안 하면 안 되는 필수적인 하루의 일과였다.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떠나는 곳은 늘 집에서 금방이라도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을 뿐이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


내 삶 속에 일어나는 매일의 일상 가운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방 하나였다.

소파와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무거운 침대를 들어 창가 쪽에 놓았다가 정중앙으로 옮기고 다시 창가 쪽으로 옮긴다.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역사적인 시를 읊었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견딜 수는 없어 방만 바꾸는 그 심정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가족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끝없는 고독 속에서 시를 읽어 벗어나기도 했다. 나의 노동이 김수영의 시처럼 근사하기라도 바랐다. 민족의 투사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무엇이 되길 바랐지만, 항상 나의 행로는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주부인 것이다. 대부분 일터로 나가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일터에 나가 수익을 창출한다. 수익은 분배된다. 분배된 자들은 그 수익으로 자본의 유익을 누린다. 아직 그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빨래가 많은 날과 비가 오는 날은 집이 온통 빨래들로 가득 찼다. 건조기를 택한 삶은 윤택해진 듯 빠르게 건조되고 빨래들은 사라졌지만,

베란다에 축축하게 걸려 있던 젖은 빨래처럼 옷걸이에 걸려 있어 집을 떠나지 못하는 나는 빨래 같다.

나의 욕망은 슬그머니 나가고 들어오고를 반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치고 난 그 밤에 무엇이든 쓰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상념을 쫓아다니느라

준비물을 체크하지 못해 미처 리코더를 못 챙긴 아이는 학교에서 리코더를 부는 시간에 말로 계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도미레도 솔라솔솔

라도시라 솔

미파솔라 솔솔미도

레레레미 레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가 안나

도미 솔도 도솔미도 말로 하지요)


비가 오고 있었다.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나가 아이가 하교할 때까지 기다렸다 해맑게 웃으며 나오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떡볶이도 함께 사 먹고 어묵국도 후루룩 마셨다.


집은 늘 돌아오는 곳이었다. 어느덧 그렇게 아이들은 내가 만든 집에서 자라고 태어났다.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었던 그곳에서 애틋하게 자라고 자랐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었다. 곰스크로 가기 위해 떠났던 그 남자는 중간의 정차역에서 한평생을 마무리한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원한 삶을 살았다.

가끔 남자들은 그녀가 원하는 삶이 결국 내가 꿈꾸던

삶이었구나, 늙어서라도 알게 되는 걸까,

무얼 원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사실 그 물음에 적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거 말고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

사랑하는 집에서 어느덧 깊은 안식을 취하고 있다 아주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철새처럼 쉬고 있다. 내 집을 어느덧 사랑하는 이유를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지금이라도 부디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

철새들은 먹이를 찾아 따뜻한 지역으로 간다.

살기 위해 날아가는 철새처럼 힘껏 날개짓했다. 철새들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절반이 바다 위에서 지쳐 빠져 죽기도 한다는데 그 모진 시간을 견디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철새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철새의 어미가 얼마나 모질고 힘든 시절들을 견뎌내고 어떻게 집으로

당도했는지 말이다.

여섯 자녀를 낳고 기르는 삶의 종착역이 결국 집이었다는 사실은 참 평범하지만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큰

신의 축복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폭풍 같은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다. 매일 쓰고 읽는 삶을 연재해 보려고 한다. 읽고 쓰는 모든 삶을 응원한다.


그저 매일 쓰고

있는 힘껏 읽어라.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 레이브래드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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