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꿈을 키워 주는 독서코칭
스물여덞 살에 둘째가 태어났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와 커리어 우먼이 되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쫓아가고 개인의 삶을 누린다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을 가거나 자신의 삶에 있어 미래지향적인 스펙을 갖추느라 바쁘다. 첫째의 유치원 재롱발표회를 보다가 응원을 하며 신이 난 나는 그만 폴짝폴짝 뛰다가 임신 37주에 양수가 흘러내렸다.
산부인과에 들어서자마자 2시간 만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출산 후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몰려왔다. 스물여덞 살의 내 모습은 이십 대 후반의 성숙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갖추기보다 임신 이후 막달에 생긴 소양증으로 인해 피부가려움증이 심해 온통 피부에 딱지가 생겼고 얼굴은 기미가 올라온 듯 스물여덞 살의 얼굴이 아니었다. 거기다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모세기관지염을 앓아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숨을 쉬기 곤란해하는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뛰고 병원에서 호흡기치료를 하며 잠시 내 미래를 생각하고 스물여덞에 누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던 나를 원망했다. 엄마로의 삶은
스스로 내가 선택한 것이니 엄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시 아이를 키우는 삶에 집중했다.
6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했다. 함께 육아하는 엄마들과 지역 맘카페에서 만나 도서관에서 품앗이 독서 모임을 하며 독후활동을 큰 아이와 함께 이어갔다. 둘째는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는 부지런히 뮤지컬, 연극, 독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했다. 육아 잡지에 소개 되는 일로 인하여 잠시 주춤했던 엄마의 삶에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아이가 돌이 될 무렵이었다.
나는 아이를 돌보느라 늘 바빴고 오직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낳은 생부가 어느 날부터 밤에 일찍 오지 않고 술에 취해 들어오거나 외박하는 날이 많았다 3교대라고 해서 외박하고 아침에 들어오는 날은 일을 마치고 오는 걸로 믿었다. 어느 날 함께 저녁에 있는데 전화가 오니 밖으로 뛰쳐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자주 연락이 오면 밖으로 나가거나 내 시선을 피했다.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니 볼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것에 대해 물었더니 왜 핸드폰을 보았느냐며 오히려 다그쳤다. 술에 취해 오더니 둘째 아기를 안고 있는 나에게 폭력을 가했고 외박이 잦았다. 결국 폭력이 일상이 되는 그 결혼의 삶을 스스로 종결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물여덞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고 품앗이 육아를 하고 유아교육전공을 되살려 직장을 가지려던 내 스무 살의 후반은 비참했다. 첫 번째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둘째는 나와 17살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첫째와 둘째와 함께 한부모의 삶을 시작했다. 동사무소에서 한부모인 혜택들에 대해 문의했다. 학교를 보내고어린이집에 보냈다. 한부모의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위태위태했다.
그렇지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이혼할 수 있어 감사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법률자문을 통해 양육비와 재산분할에 대한 판결을 받았지만 당연히 재산분할도 양육비도 주지 않았다. 법적인 시스템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부모의 삶이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독서모임을 쫓아다니듯 어린이집 교사 생활을 하며 열심히 살아갔다.
그러한 삶 속에서 만난 사람이 지금 내 곁에서 두 아들을 품어준 남편이다. 첫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고 둘째가 네 살일 때 만나 연락조차 없고 외면하고 버린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은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한 번도 보지 않고 얼굴도 잊어버린 생부보다 현재의 남편은 아버지로 자신의 젊음을 바쳐 나의 구원이 되어 주었다.
셋째가, 태어나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까지 우리 가족은 어느 평범한 가정처럼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둘째는 돌이 될 무렵 생부와 헤어지고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둘째에게 아버지는 한 사람, 지금의 내 남편이다.
진짜 아버지를 만난 둘째의 삶 그것이 그 아이의 삶의 가장 큰 선물이다. 언제나 사랑해 주는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여전히 남편은 둘째를 향한 사랑이 애틋하다. 이름의 끝자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율아(맑은율을 넣어 지었다)라며 밥 먹었느냐라고 물어보거나 먹고 싶은 거 있느냐며 요리를 해 주고
따로 용돈도 챙겨주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
애정이 담뿍 담긴 아버지 밑에서 자라 간다.
내 삶은 잠시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듯 위태로웠고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없이 비루하고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살았다. 살아있다는 건 새로운 길이 늘 열려있다는 의미이다. 여섯째를 낳을 때까지 평탄하지 않았지만 늘 길은 있었다.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스물아홉 살의 내 삶은 잠시 정체된 듯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아이들은 내 곁에서 자라고 태어나고 다시 나를 필요로 했다. 그것이 내 삶을 꿈꾸고 살게 했다.
누군가의 꿈을 키워 주는 사람은 더욱 힘차게 살게 된다 아무리 세찬 인생의 태풍을 만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더 아름다운 꿈을 펼치기 위해 잠시 흔들리지만 꿈꾸며 나아간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인생의 폭풍을 만났을 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꺾이고 흔들리고 끝난 듯 사라질 수 있다. 생명력이 강한 자연은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어김없이 오며 가을을 지나 겨울도 오고야 만다. 내 안의 여전히 사랑이 있어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둘째에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