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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Sep 06. 2016

부부싸움 최대의 숙적, 정리정돈

1:100법칙으로...퉁쳐 말아?

4년을 바라보고 있는 결혼 생활.

신혼 때, 종류별로 싸울만큼 싸우면서 더 이상은 싸우지 않을 정도로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는 시기지만

아직도 부부싸움 최전선에서 속을 긁는 부분은

바로 정리정돈이다.

아내인 내가 그때그때 치우는 스타일이라면 남편은 모아뒀다가 한 번에 치우는 스타일.


지켜보며 참는 사람과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사람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가

컨디션이 조금 안좋거나 예민할 때 너무도 쉽게 '툭' 하고 

인내심의 줄이 끊어지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물론, 줄다리기 줄이 끊어지는 쪽은 항상 내 쪽이다. 


각종 잡동사니나 옷가지를 옷장 안, 화장실 옆, 책상 위 등등에 모아두다가
어느 날 내가 옷장 안에서 깊이 쑤셔박힌 냄새나는 옷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거나, 

책상에 무너질 듯 쌓여있는 각종 서류 뭉치를 보고 한 소리 하려거나,

집에 손님이 올 계획이 잡혔다거나 해서 내가 급히 집을 치울 때 남편은 한 마디 한다. 


"여보. 저거 손대지 마. 애보느라 힘든데 내가 꼭 퇴근하고 저녁에 치울게!"

그런데 나를 생각해주는 저 말에서 우리 부부싸움이 시작될 때가 있다.

내가 저 말을 들으면 '당장 정리정돈을 시작하라'는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딱 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첫 1~2년은 남편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치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의 대가는 참담했다.

보름, 한 달, 심하게는 몇 개월이 지나도 그 말을 지키지 않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원래 뭔가 결정하는 것을 힘들어해서 외식 메뉴 조차도 거의 내가 정하다보니 

버리거나 남길 물건을 정하지 못하는 남편을 이해하느라 그 정도까지도 기다릴 수 있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그걸 계속 방관한 나도 이제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이래서 천생연분인가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거다.


산더미 같은 잡동사니 뒤에 따라오는 '내가 꼭 치울게'라는 말이 있기까지

버릴지 말지 고뇌하던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특히 가장 지저분한 책상은 내가 손을 대고 싶어도 손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여보 내가 치울게'라는 저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남편이 물건을 정리할 마음의 준비가 됐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보고 치워버리는 것이다.


남편이 쑤셔 박아놓은 쓰레기나 옷가지, 

허물벗기 신공 정도는 이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책상 정리는 아직도 어렵고 또 속이 후련해지는 특별한 날이다.


오늘이 바로 남편의 책상 정리를 한 날이었다. 

밀린 영수증과 우편물을 버리고, 어지럽게 얽힌 전선줄을 꼬아 정리하고
책과 노트를 분리해서 책은 책꽂이에, 노트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를 해두었다. 

그러다보니 남편 책장 칸까지 정돈의 영역이 확장되어서 책장 정리까지 하게됐다.


시계를 보니 책상을 정리하는데만 한 40분 정도가 지나갔는데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요즘 자격증을 따려고 준비하는 나로서는 

강의 하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 꽤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그러다보니 오늘치 진도를 제대로 빼지 못했다는 생각에 욱해서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물건 모으는 것 좀 그만두고 

제발 제 때 제 때 정리 좀 하라고 속성으로 다다다다 타박을 늘어놨다. 


그러고나서 속상한 마음으로 자격증 강의를 보려고 

책상 앞에 딱 앉았는데 책상 정리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책상 정리대는 기성품이 아닌, 남편이 원목을 사서 손수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나도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니

남편이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하라며 

좁은 책상에서 편히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 정리대를 만들어준 것이었는데,

남편이 거실 한복판에서 정리대를 만들던 모든 과정이 마음 깊이 새겨질 정도로 고마웠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집중력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독서실 책상을 알아보다가

막상 사려니 가격도 부담되고 나중에 활용도도 떨어질 것 같아서 

쇼핑몰 사진만 보며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남편이 직접 맞춤형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집중력에 좋으라고 일부러 나무향이 좋은 품종을 알아봐주고

그 향기나는 마음이 담긴 나무에 내가 원하는 디자인까지 반영해서 미니 선반까지 달아준,

독서실 책상 느낌이 나는 그 정리대.

나는 매일 이 정리대 아래서 공부한다. 


'내가 이 정리대 생기고나서 책상도 넓어지고, 허리도 곧게 펼 수 있게 되었는데

매일매일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 

고작 책상정리 못했다고 쏘아댄 것은 내가 아둔하고 미련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고 후회가 남아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나 이제 공부하려고 앉았어. 

그런데 당신이 나 공부 열심히하라고 책상 위에 정리대까지 나무로 짜서 다 만들어줬는데 난 고작 당신 책상 정리정돈 좀 했다고 일하는 당신한테 생색내고 짜증나는 전화한거 미안해요. 

생각해보니 내가 옹졸했어. 

앞으로 내가 당신 책상 정리 해줄게. 

당신이 큰 거 1번 하면 내가 작은 거 100번 하지 뭐ㅎㅎ"


그래, 앞으로 이런 마음으로 남편이 흩뿌리고 다니는 모든 옷가지와 잡동사니들을 거두어야 겠다.

 
이러다 정리대 약발 떨어지면 다음에 또 큰 건 하나 부탁해야지 싶다. 

가구 하나 만들어 달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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