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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Sep 02. 2016

며느리로 맞이한 재앙같은 명절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26세 나이에 며느리가 되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로 살며 얻는 행복보다,

그 남자의 부모님 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받는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나의 20대 후반은 그렇게 얼룩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30대가 된 지금,

조금 쌓인 결혼생활에 대한 경륜으로 시댁이라는 지독한 굴레에서 감정적으로 벗어나게 되었고

아깝게 지나쳐버린 20대 후반을 아쉬워하면서

지금이라도 조금 더 젊고, 밝고, 활기차게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오늘 쓰는 이야기는

명절스트레스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극복했는지,

어떻게 시부모님과 잘 지내고, 잘 보낼 수 있었는지에 관한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평범한 며느리들이 겪는 씁쓸한 명절의 단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에 불과하다.


그러나 명절스트레스 없는 해피한 명절을 보내는 며느리보다

제각각의 사연으로 힘들어하는 나같은 며느리가 더 흔하다는 것,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런 현실직시가 차라리 솔직하고, 진솔한 글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대 중반의 며느리를 얻은 시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그 젊은 나이에 시집을 왔으니 어쩌면 귀엽고 예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들지만,

그때는 매일같이 오는 전화를 받는게 정말 괴로웠다.


우리 부모님과도 그렇게 전화는 안 하는데 갑자기 알게 된 남편의 부모님이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한다면 나는 매일 무슨 말을 해드려야할까?

심지어 처음 1년간은 시댁에서 같이 지냈기 때문에 매일 얼굴을 보고 사는데도 그렇게 전화를 하셨다.


어쩌면 나의 명절스트레스는 여기에서부터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우리 시부모님은 '나'에 관해 알려고 하시지 않았다.

보통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어떤 취향인지 정도는 탐색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에게는 아무런 질문이 없으셨다.


좀 웃기지만,

기억나는 시부모님과의 대화가 있다면

"오늘 택배 온단다, 택배 받아둬라~"라는 지시가 있었다.


전화문제만 해도 그렇다.

매일같이 전화를 하시는 것에 대해 조금 힘든 기색을 보였지만

시부모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만일 내가 매일같이 전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셨거나,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면

전화하기를 그만 두셨겠지만 내가 싫어하든말든

시부모님의 전화집착은 계속됐다.


사실, 처음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정도로 힘들고 부담스러워하는 티를 내는데도 전화를 왜 계속 하시는건지.


우리 시부모님은 나에 대해 전혀 궁금한 게 없는걸까?

최소한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궁금한게 없으신걸까?

알면 그러지 않으실텐데...


그래서 결혼 후 처음 몇 달간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드릴 필요성을 느껴서

시부모님이 내게 하시는 행동 중 불편한 행동은 이건 이래서 싫다고 이유를 알려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넌 참 까다롭구나"였다.


그런데 몇 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나라는 사람을 알아갈 필요가 없어서 그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며느리란 그저,

아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아들을 옆에서 잘 챙겨주고 뒷바라지하면 되는 존재이니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지만 여자들은 아직 이런 인식 속에 허우적대고 있다.

시어머니도 그런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서러움을 느끼던 젊은 날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서러움의 대가 끊이지 않고 아직은 대물림되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시댁이니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좋을리 만무했다.


명절날이라고 예외는 없을테니,

내 개인적인 사정 같은건 어차피 고려되지도 않을테고,

특유의 명령형 어투의 일방적인 대화만 오고가겠지.


그때 나는 고위험 임산부라서 병원에서 입원을 권장할 정도라

시댁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집안일도 제대로 돕지 못했다.

눈치는 많이 보였지만 아기를 낳을 때까지 일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눈칫밥 얻어먹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명절이 다가오니 어떻게 해야하나 눈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다행히, 어머님께서 '이번 한 번만 봐줄게~'하고 배려를 해 주셔서

임신 중에는 명절날 차례를 지내러가지 않았지만

그 '봐준다'는 표현이 어째 편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아기를 출산하고, 두 번째 명절이 찾아왔다.

결혼 후 첫 명절날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어머님의 노고를 덜어드리리라 다짐을 했고,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명절날 옆에 앉아있던 친척과 하는 이야기를 듣게됐다.


"쟤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 집안일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못 해.

(며느리가 많이 안 도와줘요~?) 내가 혼자 다 했지. 며느리가 난 아직 좀 불편해"


어머님은 악의 없이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일단, 같이 살면서도 매일같이 나에게 전화하시던 어머님이신데, 이제와서 불편하다니.

그럼 그동안 매일같이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하나 고민하며 전화받던 나는 뭐가 되는가.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처음 지내보는 차례를 내가 능숙하게 도울 수는 없었다.

그것을 시어머님도 알고 계신다.

그래도 갓난아기 봐 가며, 열심히 도와드리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님 눈에는 내가 한참 모자랐던 것 같다.


그 날의 상처가 나에겐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시댁을 불신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남편을 키워주신 부모님으로서 순수하게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던 내 마음은 시들어버렸다.


그날 이후, 명절날 받은 충격을 큰 줄기로,

시댁에서 느끼는 서운함들이 가지를 치며 뻗어나갔다.

덜 여문 며느리 마음 속에 시댁에 대한 불만의 나무가 쑥쑥 자라나게 되었다.


명절스트레스의 진짜 문제는,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부갈등을 폭발시키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명절은 일종의 도마처럼 아직 다 성숙하지 못한 한 가정을 올려놓고

여러 사람의 잣대를 기울이며 칼질을 해댄다.

며느리에게 있어서는

시댁중심의 잣대로 평가당하고, 개인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강요받는 모든 일들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어김없이 차례를 지내러 내려간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전 부치기, 차례 당일 아침 설거지 하기.

일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 일을 하는 동안 벌어지는 강압적인 분위기, 기대치를 견디는 것이 힘들다.


조금 더 용기내서 솔직해지면,

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취급을 받고 살면서

그들을 위해 참기만 해야하는 내 모습을 견디기가 힘들다.

내 의견 한 번 받아들여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그들의 요구만 따라야 하는 것이 싫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의 부모님이라도, 나와 시댁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로 다가온다.


지난번 명절때는 전 부치는걸 돕기 위해 시댁에 갔다가

친정아버지 고향을 욕하는 시어머니 말씀에 기분이 상해서 집에 돌아왔었다.


뜬금없이 "OO도 사람들은 왜그런다니? 하여간#@$#@%#OO도 사람들은~!#$#$#@$"

아마 어머님은 나와 수다를 떨고 싶으셨던 것이겠지만

내 귀에는 아버지 욕으로 들렸다.


시어머님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 어디인지 너무 잘 알고 계시는 데다가

욕하는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보니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비뚤어진 인격 문제였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내 앞에서 우리 아버지의 고향을 그렇게 신랄하게 욕할 수 있는것은

어머님에게 나라는 사람은 함께 전을 뒤집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이기에

내가 그 고향 태생의 딸이라는 사실도 어머니 생각 속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고 생각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우리 친정 부모님이 내 남편이 듣는 앞에서

시부모님 고향을 싸잡아 욕하고

그 지역 사람들은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면

난 얼굴이 화끈거려서 절대 그걸 듣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시댁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해서

이젠 나도 어머님처럼 똑같이 악의없이 어머님을 대한다.

어머님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삶의 배경을 머리 속에서 지우고 말을 시작하니 편해졌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포기하면서

나도 그저 그런 며느리가 됐다.

내가 그렇게 어머님을 마음 속에서 지워가고 악의없이 내뱉는 그런 말들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왠일인지 어머님은 말을 아끼셨다.


가까이서 보면 통쾌한 복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니 나는 슬프다.


20대 중반,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고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

처음 뵌 따뜻한 시부모님이 참 좋았다.


그런 마음으로 시부모님을 대하던 내 모습.

그런 나와 시부모님이 만들어갈 고부관계가 기대됐었는데

이젠 나도 그저그런 며느리로 살고 있다.


재앙같은 명절.

이번 명절은 무사히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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