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어둠이 어둠을 가장 잘 안다.
"자신의 어둠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의 어둠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Knowing your own darkness is the best method for dealing with the darknesses of other people."
칼 융 (Carl Jung)
《언어의 온도》 책 처음에 나오는 글이다. 홍대 입구역 지하철에서 우연히 할머니와 손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잘 알아요" 손자의 순수한 물음에 작가는 "할머니는 다 잘 알지" " 할머니는 너를 사랑하니까" 이런 대답을 예상했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란다" 그 첫 문장을 읽고, 나는 이 책을 바로 구입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위로는 더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만들었다. 그들의 위로는 전혀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그 저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내 고통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할수록 그들의 말과 나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에픽토스는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어봐야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곱씹어 본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마치 짙은 안갯속을 걸으며 길을 찾는 것과 같다. 고통의 크기와 형태가 각기 다르기에, 타인의 아픔을 완벽히 이해한 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지도 모른다. 내게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위로의 말로 나를 감싸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눈빛으로, 때로는 손 끝으로 옆에 있었다.
의사 봉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지난 상처와 나의 지금의 상처가 다리로 연결되어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종종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만, 힘이 들어간 위로는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 지친 사람에게 '힘 내'라고 말하는 것처럼.
칼 융이 말했듯, 자신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의 어둠을 다룰 수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나에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타인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마음은 활짝 열고, 입은 굳게 닫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