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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핌비 Sep 16. 2019

4화. 비련의 여주인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항암주사를 맞았다. 

두 가지 약물을 투여하는데, 직접 살에 닿으면 살이 타 들어갈 수도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약물을 내 몸에 약 4시간 동안 투입하기 시작했다.   TV에서 본 것은 있어서 항암치료 후 괴로워하며 구토를 하거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씩 빠질  것이라 마음의 준비를 하며,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으나, 이틀 정도는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어라 괜찮네 ~ 괜히 겁먹었네 '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던 아빠는 내 방을 포함 화장실, 거실을 반짝반짝하게  청소를 해놓으셨다.  사랑의 표현이 서툴렀을 뿐. 서운했던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부모님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나를 조심조심 다루며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회사에  인수인계할 자료들과 지금까지의 진행사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져 있었다. 신기했다. 손으로 머리를 잡아당기니 쑤욱 쑤욱 빠진다. 마치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을 꺼내는 기분이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옷을 챙겨 입고  미용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 엄마와 아빠는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동네에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하는 눈 빛이 보였다. 따라나선다는 엄마를 만류하고 나는 집에서 가장 먼 미용실로 가서 삭발을 했다. 사실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아서 가장 가까운 미용실에 가서 삭발을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숍에서는  빠른 쾌유를 빈다며 3천 원만 돈을 받았다.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동정받는 한 사람이 된 거구나.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들의 입장이었으면 같은 행위를 했을 테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시선에 복잡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다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볼 때, 나의 눈빛은 어땠을까?  매력적인 사람을 볼 때의 눈 빛과 불쌍한 사람들을 볼 때의 눈빛이 과연 같았을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나와 많이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때 혹은  힘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눈빛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항암주사는 무섭게 나의 백혈구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백혈구의 수치가 줄어 들 수록 난 TV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적절하게 복용하면 참을 만했고, 잠을 자면 되는 일었는데, 나는 첫 항암주사를 맞았을 때만 해도  진통제를 전혀 먹지 않고 버텨 보았다. 


그래서  더욱더  비련의 여주인공의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두려운 마음에 홀로 떨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맞다. 나의 고등학교 절친 친오빠가 유방암 전문의라는 사실.  친구가 몇 년 전 농담처럼 일산에 오빠가 병원을 개원했으니, 가서 검사 한번 받아 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때 그 친구 집에서 몰래 친구 오빠가 빌려온 야한 비디오 ( 나름...) 『사관과 신사』를 보다가 가장 야한 장면에서 큰 오빠가 문을 벌컥 열어 친구와 나는 무척 당황했었고, 형도 바로 문을 닫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몇 달 동안 친구 집에 놀러 가지 않았다. 또 하나 생각난다.  국립 서초 도서관이 처음 생겼을 때 공부한다고 같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형아는 엄청 두꺼운 원서를 들고 공부를 했었고, 친구와 나는 끝없는 대화를 나누며 기다렸던 기억.  


미국에는 있는 친구에 카톡을 보냈다.'친구야 ~ 나 유방암 3기 말 이래. 주사를 맞았는데 ~ 이것저것 너무 궁금한 게 많아'라고 톡을 보내자 친구는 바로  친오빠 핸드폰 번호를 주었고, 바로 카톡으로 전화가 왔다. 

" 큰 형아한테 이야기할 테니 아무 때나 막 전화해도 괜찮아. 비싼 돈 들여 공부했으니,  궁금한 것 있으면 밤 낮 없이 전화하거나 메시지 남겨놔.  내가 전화해 놓을게. " 

- 친구는 오빠가 둘인데 첫째 오빠는 형아라 부르고 둘째 오빠는 오빠라고 부른다 - 


담당의사는 아니었지만, 잘 아는 사람이 의사라는 사실은  심적으로 매우 든든한 일이었다. 


그 날 이후, 친구는 백혈구가 500 이상 되는 날이면 늘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읽어 주었다.  비련의 여 주인공에게는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형아와  보석 같은 친구가 곁에 있었다. 


사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조건 없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이 나였다.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한다고 '일'을 한다고 너무 무심했다는 것이 미안하고 미안했다. 


그러자, 그동안 일을 하면서 맘에 들지 않아 미워했던 모든 사람들이 용서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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