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쉼
암선고를 대하는 자세 : 나는 웃고, 엄마는 울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비가 많이 와서 집이 침수된 적이 있다. 그 때 온 집안이 흙탕물이 된 것 보다 학교에 가지 않고, 물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신났던 기억이 난다. 북한에서 수재민을 위한 쌀과 담요를 주었는데, 의기양양 하게 엄마에게 주었던 기억도 있다. 어릴 때였으니까. 그런데 암 선고를 받은 그 날 사실 생각만큼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 당시 회사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라 속으로 '앗싸'를 외치는 나이는 많지만 철없이 성장한 어른아이였음을 인정한다.
#병원에서 검사하는 날
초음파 검사하는 의사의 행동이 매우 수상했다. 보통은 정해진 부위만 초음파 검사를 하건만, 진뜩진뜩 한 액체를 검사부위 뿐만 아니라 목을 지나 귀까지, 겨드랑이를 지나 옆구리 까지 구석구석 온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순간 나는 두가지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 의사 선생님 굉장히 꼼꼼하시네 ' 하다가 혹시 '과잉 검사하고 비용을 청구하는거 아니야 ' 라는 삐딱한 시선을 잠시 가졌지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법. 의사의 눈이 선하고 뭔가 안스러운 눈이었다. 조직검사를 바로 권해서 맘모톰 검사까지 마친 후, 꼼꼼하게 붕대를 과하게 칭칭 감아주며, 빠른 처리를 해줄테니 보호자와 꼭 함께 오라고 했다.
#당신은 유방암 3기말입니다.
다음 날 아침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엄마는 뭔가 직감을 하셨는지 나보다 더 초조한 얼굴이 었고, 나를 쳐다보는 간호사들 얼굴과 의사의 얼굴에 뭔가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직감했지만, 암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건 남들 이야기니까. 드라마 속 이야기니까.
의사 선생님의 침묵.
그 때 갑자기 엄마의 한 마디 " 넌 나가 있어. 엄마가 혼자 들을 께 "
잉 ? " 엄마 ~ 드라마를 너무 본 것 같애. 이런 건 같이 듣는 거야. "
어색하고 심각한 자리에 내가 한 말 때문에 순간 웃긴 분위기가 연출되었지만, 모두다 웃음을 잘 참아냈다.
" 같이 들으셔야 합니다. 따님은 현재 유방암 3기 말입니다. "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멍 했다.
" 죽나요? 선생님 " 나는 물었다.
" 죽지는 않고 1~2년 정도 치료 받고 안정을 취하면 완치 가능합니다. "
" 아 ~ 잘 치료받고, 쉬면 되는 거네요?"
" 네 ~ 젊은 나이라 바로 월요일날 모든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큰 병원에 가예약을 해두었습니다.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
난 속으로 '앗싸 ~ 나에게 안식년이 주어졌구나' ' 상무 진짜 엿먹겠군 ㅎㅎ' 하며 웃음이 나는데, 엄마는 옆에서 계속 울고 계셨다. " 엄마~ 울지마. 미안해. "
집에 돌아오자 마자 , 아빠는 엄청 화를 내셨다. 몸 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3기말이 될 정도로 몰랐냐고. 소녀 같은 엄마는 아빠에게 더 벼락같이 화를 냈다. 역시 엄마는 자식 앞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부모님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태어나서 부터 지금까지 특별히 크게 속썩이지 않던 자랑스러웠던 딸이 한 순간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는 지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 하늘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암덩어리'었던 것 같다. 만약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나'를 모를고 살았을 테니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시련이 온다고 한다. 부모님 덕분에 부모님의 원하는대로 40년을 잘 살아왔으니, 이제 남은 날은 '나'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신이 주었다는 생각이 지금은 들지만, 그 당시에 철없던 어른아이는 그냥 극심한 회사 스트레스에서 정당한 이유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난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구...
삶에서 조화가 와장창 깨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분명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잠깐 쉬었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조화가 깨지는 일이 없다면 나는 지금도 쳇바퀴 안에서 열심히 그것이 전부인 듯 열심히 돌리고 있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