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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Jan 15. 2021

퇴사로 잠깐의 즐거움을 샀습니다.


퇴사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전국적 퇴사 열풍이라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나이가 비슷해 처음 들어간 회사에 있는 없는 정 다 떨어 시기 맞물렸고, 무슨 인스타그램 감성 카페 유행하듯이 여기저기 퇴사 소식을 전해왔다.


여기에는 퇴사 후 여행이나 여가 생활을 즐기는 사람, 제2의 인생을 찾은 사람들의 출판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퇴사하지 않는 사람은 미진한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빠르게 번진 그 불길에 나도 편승다. 4년 반을 넘게 다닌 회사에서 5주년 장기근속 휴가와 보너스를 앞두고 GG를 선언했다.


조직 개편으로 만난 새로운 상사는 정말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호르몬 탓에 팀원들은 늘 긴장상태를 유지했어야 했다. 남아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퇴사를 선언한다는 것이 그의 견고한 팀체제에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라 생각해 통쾌한 마음도 있었다. 물론 그는 동요하지 않았지만.


처음 몇 달은 정말 신나게 놀았다. 퇴직금이 꽂히자마자 동남아로 제주도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휴가 때마다 회사에서 오는 연락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고, 다음 날 출근해야 해서 덜 노는 일도 없었다.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1년 2개월을 쉬었다. 요즘 뭐하냐 물으면 논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단내가 날 정도로 오래 쉬었다. 아직도?라고 되묻는 사람도 많았고, 자취생이 1년을 넘게 쉬는 것도 대단하다박수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월세와 공과금 50만 원이 자동 이체될 때마다 울리는 알람 속 통장잔고를 마주하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럼에도 다시 일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못해서'이다. 겨우겨우 서류합격을 해도 면접에서 떨어지기 부지기수. 1차 면접을 붙고 임원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적도 더러 있었다. 놀고 싶어서 논게 아니었다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유행처럼 번진 퇴사는 일자리에 목마른 사슴들을 우후죽순 만들어냈고, 고만고만한 경력을 가진 사슴들은 목숨을 걸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이 무슨.


어떻게 1년은 버텼냐고? 4년 7개월 노동의 대가인 퇴직금과 우연한 기회로 얻은 아르바이트 품삯 나머지는 그동안 모은 보험이나 적금을 해지했고, 그마저도 안됐을 때 은행 대출까지 받았다. 갈 때까지 갔었다.

은행도 참 그렇다. 직업도 없는 나를 뭘 믿고 돈을 덜컥 덜컥 빌려줬을까. 덕분에 살긴 했다만 덕분에 나태해진 것도 맞다. 그때는 고맙고 지금은 원망하네?


예전에 엄마가 내 신년운세를 봤었는데 금전운 풀이가 화려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마르지 않는 샘. 금전이 마르지 않는 샘인데 그 물줄기가 가녀리다. 로또 같은 일확천금은 팔자에 없고, 돈이 떨어질만하면 어디서 조금씩 생겨난다고 해서 마르지 않는 샘. 이왕이면 내천이나 강같이 좀 큰 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샘물을 너무 졸졸졸이잖아요.


백수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점집에 찾아가 절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통장잔고는 아슬아슬하게 마르지 않았다. 퇴직금이 떨어질만하니 아르바이트 자리가 들어왔고, 그마저도 끊기니 누가 예전에 빌려갔던 돈을 돌려준다며 갚지를 않나, 퇴직급여가 잘못 계산된 것이 있다고 돌려주지를 않나, 마르지 않는 이유도 굉장히 다양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는 이렇게 오래 일을 쉬지 않겠다 다짐했다. 잔고가 바닥을 보일 때마다 자괴감을 넘어서 내 존재의 이유를 되물을 정도로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은행 대출을 알아보며 심사에서 탈락할까 봐 마음 졸이며 눈물 흘렸던 그 새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출근하는 친구들은 매일이 연차인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어딘가 소속되어 있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소속이 없으니 대출을 많이 받을 수가 없더라 얘들아. 


안타깝게도 지금 나는 또 백수다. 코시국에 미안하리만큼 일이 없어서 월급 받는 것도 송구스럽지만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데 그걸 박차고 나왔다. 부푼 꿈이 있다거나 도전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하필 몸이 좀 안 좋았다.


2020년 10월 퇴사 후 4개월 차 백수에 접어들었다. 두 번째 백수 시절을 맞이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퇴사는 즐거운 휴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야 프리랜서다 뭐다 재미있게 일하며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우리에겐 현실이고, 생존이다.


다행히(?) 제1 백수 시절에는 월세를 냈고, 지금은 월세보다는 적은 전세자금 대출 이자를 내야 한다. 원금은 꿈도 꾸지 않는다. 사실 이사하면서 월세를 아끼는 대신 그 돈을 저금해서 2년 뒤에는 더 좋은 집으로 가자 계산을 때렸었는데 퇴사로 인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거봐 현실이라니까.


퇴직금은 이미 동났다. 태평스럽게 계획 없이 펑펑 써버린 탓도 있고, 대부분 병원비로 탕진했다. 다행히 또 마르지 않는 샘의 법칙이 지금도 통하는 중이긴 하다. 다이어트 내기를 해서 엄마에게 100만 원을 받았고, 병원비 보험청구로 일정 금액 돈을 돌려받기도 했고,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꺼내 쓰는 중이다.


1월 25일 카드값과 모든 고정지출을 해결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지출 현황표를 꺼내 다시 또 잔고와 씨름해야 한다.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잘 생각해보자. 내가 나를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변수는 없는지 고민하고 고민해야 한다. 미래계획을 러프하게라도 세워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시국이 이래서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그 돈은 굳었.... 어휴..


물론 때려치움으로 인해 얻 한시적 즐거움과 통쾌함도 있다. 야금야금 꺼내먹을 돈이 줄어들고 있다면 즐거움은 불안함이 되고, 통쾌함은 불편함이 된다. 퇴사가 고민된다면 은행 앱을 열고 잔고를 확인하자. 나의 한시적 즐거움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잔고가 길고 화려할수록 즐거움의 길이와 통쾌함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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