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일기) 내가 엄마가 된다면 - 1편. 사랑
봄날이었다. 임신을 했으니 이제 꾸준히 운동을 해야겠다며 회사 앞 여의도 공원을 점심시간마다 혼자 걸었다. 그렇게 산책을 하던 중 한 무리의 꼬마 친구들을 만났다. 어느 유치원에서 나들이를 나온듯 했다. 친구와 두 손 꼭 붙잡고 걸어가는 아이도 보였고,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지나가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무엇 때문인지 아옹다옹 다투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원래 아이들만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어색해하고, 슬쩍 피해 다니곤 했던 나였는데, 내가 아이들을 보며 웃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내 아이의 친구 같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세상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달라지고, 내 마음이 달라졌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도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만 보면 남편에게 아기가 너무 예쁘다고 유난을 떨었다. 아기가 방긋 웃어주면 덩달아 나도 좋아라 크게 미소 지었다.
“어머, 저 애기 너무 예쁘다.”는 말은 아이들이 보이는 곳이면 연실 터져 나왔다. 남편이 가끔 “저 애기는 좀 안 예쁜데.”라고 얘기하면, “아니, 안 예쁜 애기가 어디 있어요. 다 예쁘죠, 다.”라고 응답했다. 진심이었다. 우리 아이가 예쁘듯, 다른 아이들도 다 예뻤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순수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좋았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나를 좀 봐주세요’, ‘나를 좀 이해해 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하며 마음으로 울부짖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 눈에는 시끄럽고, 말썽만 부리는, 혹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질 그런 아이들이었다. 스쳐 지나갔던 기사와 영상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에서 만난 마음 아픈 아이들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2011년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OECD 23개국 중 최하라는 기사를 읽었다. 15~24세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기사도 올라왔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살면서 불행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핵가족화, 맞벌이부부의 증가, 성적만 중히 여기는 교육 분위기 등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혹시 우리들 마음 속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실종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삶보다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지하철에서 할아버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하며 화를 내는 아이의 영상이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안볼 때 춤추며 장난을 치거나, 수업시간 도중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차며 아이들을 비난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살피고, 배려할 수 있는 아이로 컸더라면 그들이 그렇게까지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가 먼저 저 아이들의 마음과 감정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 아이를 사랑하듯,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아이의 아픔뿐만 아니라, 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아픔도 돌볼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프고, 아이의 친구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도 힘들고 아플 터였다.
인터넷 기사처럼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사랑보다 외로움을, 따뜻함보다 차가움을 먼저 배우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지리라 믿었다.
아이들을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내게 수줍고 귀여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러면 아이들이 신나는 듯 끊임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아이들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때는, 다그치기 보다는 따뜻한 말을 건네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어느 순간 따뜻한 말을 건네오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친구와 다투고 온 날에는 아이와 친구를 함께 다독여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우는 아이들은 마음으로 깊이 안아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우는 친구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진지한 경청, 따뜻한 손길과 포옹뿐이었다. 때로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아이들을 안을 때 마다 그들의 마음에 작은 사랑의 씨앗을 심는 상상을 했다. 그 씨앗은 또 다른 누군가 전해준 햇살을 받고, 물을 받고, 거름을 받으며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가 만든 씨앗은 여기저기에 뿌려지다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에도 건네졌다. 그 때 마다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물었다.
“달이 좋아, 별이 좋아?”
아이는 별이 좋다고 대답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별은 친구들이 있잖아. 달은 크기는 하지만, 외로워 보여.”
라고 이야기했다.
‘응. 엄마도 그래. 엄마는 네가 혼자만 빛나기 보다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 더불어 빛났으면 좋겠어. 그게, 더 아름다운 것 같아.’
은하수처럼 많은 아이들이 함께 반짝이며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파란색 글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글입니다.
(Cover Image from press � and ⭐ in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