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Feb 20. 2021

1. 바보같은 사랑에 빠지다.

(태교일기) 내가 엄마가 된다면 - 1편. 사랑

 2011년 2월 26일. 규칙적이던 달거리를 안 한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태연하게 나는 남편에게 아닐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사실 두 세달 전부터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달거리가 늦어지면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매번 나의 바램일 뿐이었다. 그 날도 실망하고 싶지 않아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정확히 두 줄이었다. 약사가 웬만하면 테스트기가 틀릴리 없다고 했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남편을 급히 불렀다. 

 “두줄 이에요!”

 테스트기를 남편에게 내밀었다. 남편 역시 진짜인지 믿겨지지 않는 듯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계속 신기해 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우리는 서로를 깊이 끌어 안았다. 서로의 행복한 마음이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저 기쁘고, 신기하고, 설레었다. 우리는 탁자 위에 테스트기를 올려놓고 서로를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 후 일주일간 우리는 아무에게도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세상에 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소년, 소녀마냥 아이를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자기 전마다 우리는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멋있을지를 상상했다. 우리를 닮아 동글동글 할거라고 얘기하며 또 웃었다. 아이가 우리의 장점만 모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일주일 뒤 산부인과에 들러 처음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콩알보다도 작아 보였다. 저 작은 생명이 우리의 아이가 된다니 실감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신기한 마음에 몇 번이고 초음파 사진을 꺼내 보았다. 사진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손주의 존재를 알려드렸다. 그 동안 내심 기대를 하고 계셨던지 너무나도 기뻐하셨다. 우리 둘만 알았을 때도 기뻤지만, 모두들 알게 되었을 때는 그 기쁨이 두 배, 세 배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아이를 상상하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편하게 앉아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아이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 내 손을 잡고 종알종알 새처럼 얘기하는 모습,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신나게 노는 모습, 내 곁에 누워 곤히 잠든 모습 등.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어떤 날에는 가만히 아이를 생각하는데 눈물이 났다. 작은 두 손, 작은 두 발, 동그란 얼굴과 미소 짓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이렇게 소중한 아이를 얻게 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누구를 붙잡고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하게 여겨졌다. 남편을 만난 것도 감사하게 여겨졌다.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것마저도 감사했다. 감사한 것들 투성이였다. 그래서 나는 또 행복했다.


 평생 사랑을 줄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혹시나 사랑 받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신의 인간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는데, 내 심장에 싹트고 있는 것이 혹시 아가페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늘 사랑 받고 싶어하고, 내 사랑이 더 크면 상처 받을까 걱정만 했는데, 내 마음에 이런 사랑이 커져 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게 매일 행복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일기장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5월 16일. 환희야, 엄마는 요즘 환희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고, 너무 신나. 사실, 하루 종일 환희 생각만 하고 살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심했나? 지난번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을 읽으면서 우리 환희 태어나면 어떻게 모유 주고, 재우고, 마사지 시키고, 기저귀 갈아주고, 울면 어떻게 대처하는 등의 것들을 벌써 상상해. 그리고 좀 더 커서 환희랑 손잡고 산, 계곡, 바다로 놀러 가고, 울 환희 밝고 건강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얼마 전에는 TV에서 어버이 날에 아가들이 카네이션을 만들어 부모님에게 전해주는데, 환희가 커서 엄마, 아빠한테 카네이션 달아줄 것 생각하니까 눈물이 다 나는 것 있지. 환희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를 거야.’


 ‘5월 29일. 환희야, 어제 환희를 만났어! 아침에 엄마 배가 너무 땅기고 아파서 산부인과에 다녀왔거든. 울 환희는 건강하고 평화롭게 잘 있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손도, 발도, 동그란 눈도, 갸름한 얼굴도 얼마나 예쁘던지, 게다가 다리도 길데! 엄마는 환희 사진보고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몰라. 엄마는 환희의 모든 모습을 사랑해. 기쁘고, 행복해. 환희는 그런 존재란다.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환희야, 세상은 너를 기다리고 있어. 두려움 없이, 자신감 가득하고, 밝고, 환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렴!’


 ‘6월 4일. 환희야, 요즘 환희가 뱃속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이런 것을 태동이라고 하나 봐. 어떤 때는 배가 간질간질 하기도 하고, 꿀렁꿀렁 하기도 하고, 너무 신기해. 환희가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있구나 생각하면 엄마는 그저 좋아. 그래서 환희가 엄마 뱃속에서 발도 움직이고, 손도 움직이면서 잘 있다고 엄마에게 자주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엄마 배를 콩콩 두드리렴. ‘엄마 저 여기 있어요’ 하면서 말이야. 환희가 두드린 곳을 엄마가 따뜻하게 문질러 줄게.’


 엄마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개를 만났다. 넘고 나면, 또 새로운 고개가 나타났다. 하지만 고개를 넘는 일이 힘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백 개, 천 개의 고개를 더 넘어야 한다고 해도, 아이와 세상을 함께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힘들 때 마다 첫 순간을 기억했다.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떨림과 그 설레임이 잔잔하게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바보 같은 사랑, 하지만 세상 모든 기쁨을 다 모은 듯한 행복한 사랑이 나를 웃게 했다.


*파란색 글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글입니다.


(Cover image from Bianca Mentil at Pixabay)

이전 02화 제1편. 사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