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이해도 받을 수 없는 무역쟁이의 이면
처음 무역을 배우러 들어간 회사는 국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조직 구조가 다소 특이했었다.
평범한 무역 팀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들을 운영하는 PM팀의 일부로 해외 프로젝트 매니저가 있었고, 회사의 여러 프로젝트들 중에서 해외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형식이었다.
이후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영국 지사로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조직들을 경험했다.
때로는 야심 차게 출범하는 새로운 해외사업 조직의 시니어 실무진으로, 때로는 오퍼상의 영업 및 해외 거래선 관리 담당자로, 때로는 이제 막 수출을 시작하는 제조기업의 해외 영업 팀장으로서 다양한 업종과 회사를 넘나들며 무역 직무를 수행해 왔다.
많은 중소기업에서 무역 업무는 일종의 특수 직무로 취급되곤 한다.
특히 해당 기업에 무역적 기반이 단단하지 않고, 새롭게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회사 내 별개의 조직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 조직과 따로 구성되어 샵인 샵처럼 별개 조직 취급은 흔하며, 새로운 인력들이 대거 밀집되어 기존 조직과 융화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업무 특성상 기존 업무 체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별개의 업무 체계를 유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다른 조직들, 기존 업무들과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장까지 잦다면 회사에 얼굴조차 잘 비추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내가 한참 대학을 다니고 취업을 준비할 시기에는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대세였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 더 이상 기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중국이 신흥 강자가 될 것이라 했던가.
그것이 벌써 십 수년이 더 지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긴 했었지만, 너무 빠르게 미국과 경쟁 구도에 들어섰고, 중국 자체의 여러 문제들로 세계의 공장이 동남아시아 각 국가들로 분산되어가고 있다.
미중 무역 분쟁에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은 물론, 예기치 못한 코로나 사태도 있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게 있어 중국이 굉장히 중요한 나라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중요도가 예전보다 많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정작 내가 취업 시장에 뛰어들고 나서 지금까지 적어도 무역에서만큼은 중국어가 대세가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흔하다는 영어 잘하는 인재는 중소기업들의 구인난 속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구하기 힘든 수준이 되어버렸으니.
나 또한 취업 당시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는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영어 실력조차도 애매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몇 년간 필드에서 여러 경험도 쌓고, 더 많이 공부도 한 끝에 이제야 좀 쓸만해진 영어 실력이지, 그때는 현장에 나가도 못 알아듣는 말이 태반이었으니까.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난 절반도 못 알아듣지만, 그 절반조차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 곳이 보통의 중소기업이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애당초 영어를 할 줄이라도 아는 사람이 나뿐이니, 신입 때부터 온갖 통번역은 물론, 해외 거래처 임원진들 사이의 통역까지도 끌려다녔다.
그 회사는 규모에 비해 큰 거래처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 내가 신입 때 끌려다니던 통역장이 결코 가벼운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사실만 말해두겠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소기업 인력난이 중소기업의 만성 질환이 된 지도 한참이고, 평범한 인력하나 구하기 힘든 회사에서 제대로 된 무역 전문가를 양껏 구비하는 것은 꿈조차 꾸기 힘든 사치에 가깝다.
더군다나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손대는 경우가 많은 무역 사업의 특성상, 무역팀은 별다른 기반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러 다니기 쉽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에서 무역팀은 항상 바쁘고 정신없는 곳이 되곤 한다.
원하는 만큼 인력을 보충해 넣기도 힘든데, 맡아야 되는 업무는 산더미다.
기존 조직에 융합되기도 어렵고, 지원을 구하기도 어렵다.
머지않아 무역 팀장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팀과 회사 자원을 갈아 넣어 어떻게든 성과를 이루어낼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체제에 묻혀 서서히 융화되어 잊힌 존재가 될 것인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동경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랬듯, 나는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무언가 색다른 능력일 가지고 있어, 남들처럼 지루한 삶이 아닌, 나만의 특별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기대했던 날들.
그런 날들 속에서 난 슈퍼 히어로도 되고, 슈퍼 빌런도 되고, 때론 세상을 구하기도 했을 테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남들과 다른 삶"이란 말의 참 뜻을 알게 될 무렵, 내 삶은 이미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정해진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처럼 수능을 보고,
다를 것 없이 대학에 들어갔으며,
모두들 한 번쯤 거쳐가는 고시를 준비하고,
그렇게 규격화된 부품이 되어 회사에 들어갔다.
특별하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과 종이 한 장 차이여서, 조금만 물에 젖어도 이면에 적힌 이상함이 드러나버리곤 한다. 무역업에 발을 딛고 이 문장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때는, 아마도 정해진 길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을 무렵일 것이다.
사실, 무역팀은 비단 회사에서만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무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리감은, 그 단어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멀고 어색하다.
때때로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의 정해진 자리를 비우고 사라져 버리는 존재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이질적인 존재가 되기 쉽다.
외롭고 힘든 타지에서의 생활은 남들이 보기엔 부러운 공짜 해외여행의 연장선으로 보이기 마련이고, 필요한 순간 가까이 내 옆에 없는 무역인 친구는 생각보다 더 빨리 멀어지기 쉽다.
내 가장 오래된 친구들은 매년 여름에 한번 연말에 한번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곤 했는데, 출장이 잦아진 이후로 언제부턴가 여름 모임엔 내가 없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게 되었다.
오래된 친구들이 아니라도 친구들의 결혼식에, 장례식에 나 대신 아내가 가는 일이 늘어나고, 가족 행사에 내가 없는 가족사진이 조금씩 쌓여간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내 주변 모든 곳으로부터 이방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