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cco May 04. 2024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비참한 삶에 대하여

전 세계를 누비는 무역인의 삶, 그 삶의 동전 뒷면에 있는 것

무역인의 삶은 동경받는 삶이다.


남들은 평생 동안 몇 번 다니기도 힘든 전 세계를 회사 돈으로 돌아다니며, 온 세상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의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하긴 하다.

나 또한 해외 출장, 특히 유럽 지역 출장을 떠날 때엔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하고, 마일리지 가득 찬 항공사 아이디를 보는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도 모르지는 않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출입국 횟수가 수십 번을 넘어간다.

다녀온 국가도 다양하다. 

가깝게는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부터, 중동 몇 개 국가들과 유럽 여러 나라들까지, 어느덧 비자 신청서에 체류 국가를 다 기록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나의 투정을 듣는 사람들은 저 놈 저거 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처음 몇 년은 참 즐거웠던 것 같다.

해외 출장은 그 자체로 설레는 일로 가득했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 만나는 세상은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마치 세상을 처음 배워가는 아기처럼, 나는 그렇게 무역인으로 새롭게 세상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세상을 처음 배워가는 아기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세상에 흥미를 잃어가기 마련인 것을.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내가 "어느 나라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라고 내 후임들을 교육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내 여권 빼곡했던 입출국 기록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을 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쌓이기만 하고 쓰지 못하는 항공 마일리지로 우수 회원 등급이 된 이후였을까.

어쩌면 날 닮은 딸아이가 해외 출장을 떠나는 아빠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될 무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해외 출장은 어느덧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출장지의 화려한 호텔은 감옥이나 다름 없어지고, 비행기는 나를 감옥으로 실어 나르는 호송차에 불과하다.

더 이상 어느 나라 어느 곳에 가더라도 새로운 감흥이 없고, 어느 순간부터 의무적으로 집에 들고 돌아갈 선물을 고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내 자리를 보며, 출장 가방을 집 어디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초라함을 곱씹는다.


난 국제 무역 전문가이다.

노련한 협상가이고, 시장을 꿰뚫는 사업 전략 전문가이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모험가이다.

항상 자신감이 넘쳐야 하며,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지만 곧바로 아무 일 없는 듯 협상에 나서 성과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두꺼운 가면 뒤에 철저하게 숨어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드러난 감정마저도 협상에서 무기로 쓸 수 있도록 나 스스로를 갉아 만든 톱밥으로 회사의 앞길을 닦아낸다.

이런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 눈엔 성공한 비즈니스 맨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출장을 다녀올 때면, 조금씩 몸이 망가져가는 것을 느낀다. 

하나씩 낡은 부품이 멈추기 시작하고, 느슨해진 나사가 빠져나가는 오래된 기계처럼.

어느 날은 불현듯 이가 시려오고, 어느 날은 불현듯 온몸이 아리다. 

전엔 하루 이틀이면 시차에 완벽했던 적응 했던 내 몸이, 

어느 순간부터는 일주일 넘게 지나도록 날 괴롭히고, 

시차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출장지로 떠나는 날 발견한다.


어쩌면, 한 사람이 평생 다닐 수 있는 해외 출장의 횟수는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끔 나가는 출장이라면 즐겁게 다닐 수 있지만, 

이미 그 횟수를 초과한 내 몸은 조금씩 망가지고 있는 걸지도.


그러니, 기록하기로 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내 감정의 부품들을 묶어 내고, 

회사에 보고하지 못할 보고서를 써 내려가자.

멈춘 부품이 떨어져 나간 이후, 

그 부품이 있던 자리를 기록으로 채울 수 있게.

그리하여 마침내 내 모든 부품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내 모습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