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는 것에서 찾은 노력 <바게트 백>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회식에 참석한다던 남편은 자정이 한참 지난 후에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내 눈엔 불이 켜져 있었다. 화가 잔뜩 나서 온몸에 독이 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갑자기 진통이 오면 어떡하지?', '늦은 밤인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괘씸함은 불안함으로 번졌다.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 도어록 버튼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덥석 내손에 붕어싸만코를 쥐어주었다.
나 많이 늦었지 미안,
아니 oo이가 다음 주 결혼하는데
아내자랑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애들이 시기할까 봐 꾹 참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자기 자랑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난 걸 모른 거 있지.
분명히 화를 내야 하는 타이밍인데 놓쳤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내가 걱정하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냐고 물었어야 했다. 나는 붕어싸만코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무슨 자랑을 한 건데?" 그러자 남편은 줄줄이 내 칭찬거리를 늘어놓았다. 그의 뛰어난 임기응변에 감탄함과 동시에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남편은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쉼 없이 조잘거렸고 난 어느새 입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유머에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 나는 항상 두 가지 상황에 취해 있었다. 남편과 술을 마시고 있거나, 웃고 있거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연구진은 대학생 250명을 대상으로 어떤 성격의 배우자를 원하는지 조사했다. 1위는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성격, 2위는 유머 감각이 많은 성격, 3위는 놀기 좋아하는 성격, 4위는 장난스러운 성격 순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싶다는 단순한 의미일 수도 있으나 배우자 선정이라는 다소 진지한 물음에 그리 쉽게 대답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주도하는 유머감각에는 많은 능력이 숨어있다.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통찰력. 적재적소에 터트리는 타이밍이 필요한 순발력. 그리고 상황파악 후 어떤 말로 대입시켜 이야기할지를 선택하는 지적능력, 마지막으로 삶을 대하는 여유로움까지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런 능력의 소유자들과 평생을 함께 한다면 생존에 유리할 거라는 본능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유머러스한 이들은 위기상황을 기회로 만들기도 하고 되려 더 나은상황으로 역전시키기도 한다.
고난이 올 때 정말 필요한 건
용기이기도 하고 인내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정말 중요한 건 유머라고
- 소설가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 中> -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 사회적 장벽을 허물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이런 움직임은 다양한 분야로 번지고 있다. 며칠 전 모스키노 2024 F/W 런웨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런웨이에서 처음 등장하는 모델이 바게트와 샐러리가 꽂힌 크래프트 백을 들고 런웨이를 걸었다.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함을 추구하는 브랜드답게 모델의 소품이 흥미롭다 생각했다. 트렌치코트에 종이 장바구니라니 워킹맘 라이프를 잘 표현했다 여기며 이탈리아 우먼들의 마트 가는 길이 감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푸른색의 샐러리를 소품으로 쓰다니 좀 아이러니했다. 정작 코트 보다 소품에 눈이 더 쏠렸기 때문이다. '어? 그렇다면 의도적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모스키노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갔다. 예상이 적중했다. 종이 가방은 물론 바게트와 셀러리가 모두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모스키노의 가방으로 판매 중이었다.
이번 런웨이는 모스키노의 내부적인 이유로 새로운 아트 디렉터가 한 달 만에 준비한 컬렉션이었다. 모스키노의 유쾌한 에너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예상밖의 것들을 충돌시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장바구니를 든 모델의 등장에 뒤이어 물음표가 그려진 셔츠와 종이배 모양의 모자 등이 등장했다. 이 런웨이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가장 큰 힘은 '다음엔 어떤 흥미로운 패션이 등장할까?'라는 호기심과 '이런 조합이 가능하다고?'라는 유쾌함이었다.
런웨이가 끝나자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강아지와 함께 등장한 디렉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바게트 백은 트렌치코트 외에 어떤 룩에 어울릴까요?' '왜 수많은 빵 중에 바게트를 생각했나요?' '종이배 모자는 펼칠 수 있나요?' 이런 컬렉션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이 궁금해졌다. 컬렉션을 준비하는 아이디어 회의는 어땠을지, 다양한 영감을 얻은 장소와 경험은 무엇이었을지 등 말이다.
패션쇼에 선보인 다양한 모티브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과 디자이너의 익살스러움이 더해져 새로운 스토리가 계속 만들어진다. 유머는 강한 주목성과 다가가 묻고 싶어지는 친근함이 있다. 장난기 넘치는 모스키노 제품들은 내게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마!
그리고 유머를 잃지 마!
남편과 티격태격하며 지내다가 지금은 남편과 똑 닮은 아들 둘과 티격태격한다. 평소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아들에게 날 선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면 '필통에 발이 달렸는 줄 알았는데, 날개가 달렸더라고요!' 라며 능청스럽게 받아친다. 생각지 못한 멘트에 난 또 화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허튼 웃음조차 화를 무력화시키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이다. 유머에 자주 노출 되면 이상하게도 힘들지가 않다. 힘든 상황도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고 유머를 잃지 말라는 말은 너라는 우주를 잘 돌보라는 또 다른 말은 아닐까?
운명과 유머는 같이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신학자 하비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