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와 생 채소

쏟아지는 위기의 파도 속에서.

by DesignBackstage

밀키트와 생 채소. 우리 집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식재료들이다. 마트를 운영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소 간소한 식재료가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요리를 잘 못한다. 때문에 주로 밀키트로 요리를 하거나 최소한의 조리만으로도 가능한 요리를 선호한다. 고기는 간단히 소금 후추 간을 하고 구워 먹고, 야채는 깨끗이 씻어서 생 야채 그대로 먹는다. 때문에 고기와 야채의 신선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기나 야채에 짙은 양념이 씌워지는 요리라면 신선도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식탁 위에선 통하지 않는다. 내가 신선도 높은 재료에 눈을 치켜뜨는 이유다.


마트에서 20% 이상 높은 매출을 차지하는 품목은 야채다. S마트의 야채코너를 가장 먼저 찾은 건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했지만, 마트의 중요한 코너이기 때문도 있었다. S마트의 야채코너에서 거슬리는 곳이 있었다. 야채들이 쌓여 있는 메인 매대를 지나자, 팔다리가 잘린듯한 야채들이 묶여 봉지나 랩에 씌워진 채 뒤쪽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봉지 안에 있는 잘린 애호박들이 세 개에 1,000원에 팔고 있었고, 버섯모둠도 종류별로 랩에 쌓여 1,000원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이 정도면 ‘야채 다이소’라고. 간판을 하나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마다 야채를 매입하는 팀장에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격을 저렴하게 들여오려다 보니, 대량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제때 팔리지 않아 소분하여 1000원에 팔거나, 폐기 처분한다고 말이다. 사실 10년 넘게 운영해 온 이런 방식에 문제는 없었다. 왜냐면 그동안 대량매입해 온 신선채소들은 당일에 대부분 소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출이 떨어지면서 대량매입한 채소는 다 팔리지 않고 쌓여갔고 재고분이 있어 매일 가던 농판장도 이틀에 한번 꼴로 가게 된 것이다. 가격을 지금처럼 싸게 매입하지 못하더라도 요일별 판매량을 확인 후 판매량의 20% 정도만 재고로 가져가기로 했다. 소량 구매로 매입가격이 높아지리라는 걱정이 있지만, 시든 야채 폐기 비용과 덜 신선한 야채를 파는 마트의 이미지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면 가격은 전혀 리스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트로 전화가 온건 그때쯤이었다.

아니 무슨 쓰레기를 갖다 팔아요?


단골식당의 전화였다. 아침에 주문한 청경채 한 박스가 늦은 점심에 배달됐는데. 숨이 푹 죽고 짓무른 게 왔다고 반품처리 해달라는 전화였다. ' 직원들이 청경채 상태를 확인하고 배송시킨 걸 봤는데 무슨 일이지?'의아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반품처리를 하고 오전에 주문을 받고부터의 행적을 쫒았다. 직원이 장을 보고 대기존에 카트를 놔두면 배송기사가 픽업을 해서 패킹 후 배송이 시작된다. 그런데 냉방이 되어있어야 할 대기존에 냉방시설을 꺼져 있었다. 이날 기온은 무려 36도였다. 배송기사는 일찍 주문받은 제품을 포장해 냉장차 가장 바닥에 실었다. 켜켜이 다른 배송지의 제품들이 쌓였다. 그리고 바로 출발했으면 좋았으련만 탑차가 가득 채워지길 기다렸다가 배송을 시작했다. 이 또한 주문량이 많을 때는 회전율이 빨라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주문량에 같은 방식을 고집하는 건 매출이 곤두박질치는 일이었다. 아니 이미 곤두박질친 매출이 지하를 뚫고 들어갈 판이었다. 대기존 냉방시설 가동 후 차에 실기 전까지 모든 상품을 이곳에서 대기 후 배송직전에 차에 싣기로 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새로운 프로모션과 다양한 이벤트를 시즌별로 기획하고 싶었다. 트렌드 리서치한 경력을 살려 마트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시즌별 날씨별 매대변화를 주고, 건강프로그램과 연계된 식품전시, 고객제안에 대한 피드백을 SNS에 게재하는 등 솟구치는 아이디어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나를 진정시키기 바빴던 아버님이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기초를 잘 다듬고 응용, 심화과정으로 넘어갔어야 하는데, 나는 S마트가 기초과정을 힘겹게 보내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속도가 너무 달랐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S마트는 엔진이 좋지 않은 상태로 비상등을 켜고 갓길을 달리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였다. 발주 및 매입 조건 변경부터, 배송시스템과 고객응대까지 모든 변화가 필요했다.


근처 다른 대형마트의 시장조사를 나갔다. 전방 500m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마트는 우리 고객들과 동선이 겹쳤다. 그런데 나는 이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분명 인구 조사했을 당시 13%에 불과했던 20대 고객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인근에 대학교가 하나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20대를 원주지역에서 한꺼번에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S마트에선 보기 힘든 고객이다 보니 눈이 휘둥그레져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 봤다. 그들이 모여 있는 존을 발견했다. 무려 10명의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곳이었다.


밀키트 존

freepik


자취하는 이들이나 신혼부부들로 보이는 20대 남녀들이 메뉴를 고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외식하기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고, 아직은 요리에 서투른 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이 있을까?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최고의 대안이었다. 메뉴 또한 다양했다. 주꾸미 떡볶이, 스팸부대찌개, 밀푀유 샤부샤부.. 눈을 질끈 감았다. S마트에는 밀키트를 만들어 판매하지는 않았다. 우린 작은 수치라 여기며 간과했던 고객층을 이렇게 뺏겨버렸다. 그들의 발 빠른 시장 대응에 S마트 엔진은 더 크게 덜덜 거리는 듯했다. 그 와 중에 밀키트 존의 메뉴개수와 직원수를 세며 '인건비와 재료비가 과연 밀키트 매출액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밀키트 원가는 과연 얼마일까?'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손익을 따지며 고개를 들었을 때 북적이는 고객들 뒤로 나는 더 큰 게 보였다. 젊은 층의 유입으로 활기차진 마트 분위기, 타 마트에 없는 차별화 콘텐츠로 당장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말이다.


차별화와 위기 대응력, 이 두 가지는 S마트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먼저 유연한 정책과 시스템으로 당장의 위기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차별화를 고민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중장기 계획을 그리며 마트를 나섰다. 액션 플랜을 차근차근 세워나야겠다고 다짐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안내대에서 일하던 직원이 그만두겠다는 소식이었다. 고객 항의 전화, 경쟁사의 승승장구, 그리고 직원의 퇴사까지 하루 만에 감당하기 벅찬 문제들이 줄줄이 터졌다. 직원의 퇴사 이유를 들었을 때 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마트 위기의 본질적인 요인들이 하나 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직원의 퇴사 결심은 고양이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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