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타자소리는 카트 바퀴소리로

드디어 첫 출근,

by DesignBackstage

퇴사 후 몇 주간의 휴식을 갖고 드디어 사업장의 첫 출근 날이다. 하이힐과 펜슬스커트를 입는 대신 운동화에 면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시댁이 운영하는 마트는 강원도 원주에 소재한 사업장으로 서울에서 빠르면 1시간 30분이 걸린다. 숨도 안 쉬어지던 꽉 찬 지하철이 아니라 녹음이 짙게 깔린 산능성이를 보며 광주원주 고속도로를 달렸다. 열두 번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내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달리는 게 실감 났다.


마트로 가는 길 내내 직원들에게 첫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내 이력을 구구절절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간단명료하게 하는 게 좋을까? 결국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고 눈빛과 말투를 바꿔가며 여러 버전으로 연습했다. 차 안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얼마나 연습했는지,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기계처럼 대답할 것 같았다. 누군가는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지 않냐고 했지만, 사무실 출근이 익숙했던 나에게 매장 출근은 맨땅이 아니라 번지점프를 하는 느낌이었다. 정말 벌벌벌 떨렸다. 나는 오픈이래 가장 매출이 저조한 시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첫 출근을 했다. 사실 내가 출근한 S마트는 다섯 달 전부터 상황이 어려워졌다. 인근에 새로운 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며 조금씩 매출이 줄더니 계속 하향 곡선을 그렸다.


17년간 다니던 회사에 대표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 경험을 했었다. 회사를 다니며 막연히 나중에 내가 사장이 된다면 저 대표처럼 되야겠다 생각하던 대표가 있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원론적인 질문을 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속으로 예산을 증액해주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표실 문을 닫고 나오면 이상하게 대표가 한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제받으러 갈 때마다 눈앞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던 나에게 전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질문을 했다. 대표가 회사를 떠나던 날 인사를 나누며 속에 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었다. "대표님 덕분에 업무에 대해 그리고 제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흐뭇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열정적인 직원분과 함께여서 좋았습니다." 마지막 나눴던 나에 대한 긍정적인 말에 용기가 났던 걸까? 퇴사하자마자 전 대표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자로 퇴사했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구질구질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했다. 사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대답을 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문자를 보내고 긴 문자를 읽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전화가 왔다. 전 대표였다. 먼저 퇴사소식을 알려줘서 반가웠다는 말과 함께 내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나의 수많은 TMI정보를 쏟아냈다. "일단 마트 상황 파악이 중요하겠네요, 처음부터 뭔가 바꾸려고 힘주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과 함께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 붙여주셨다.


"전 수많은 직원들이
데이터 베이스가 있잖아요.
ㅇㅇ씨는 잘 할겁니다!
ㅇㅇ씨 자신을 믿으셔도 되요!"


생각지도 못한 멘트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앞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정말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안개속에서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길이 또렷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통화를 기억하며 마음을 재 정비했다. 한결 고요해진 마음으로 마트 앞에 도착했다.


마트에 들어서는 순간, 사무실 풍경과는 180도 달랐다. 마트의 저조한 매출에 대한 원인분석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나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점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회의실에서 전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각 팀장들과 회의하며 지금 마트 상황을 들어야 겠다고 계획했다. 하지만 향긋한 커피 한잔이 아닌 물 한 모금 마실 정신도 없었다. 새벽 6시부터 문을 여는 마트는 이미 손님과 배달이 밀려들었고, 직원들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제 할 일 하느라 바빴다. 야채, 청과팀장들은 오전부터 새벽 농산물 도매시장에 다녀오느라 매장에 없었고, 배달팀은 오전부터 밀려드는 배달품목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결국 내가 준비했던 공식적인 인사를 하지 못했다. 아버님은 분주한 마트를 다니며 나를 팀장들에게 인사시켰다.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아버님은 나를 소개했고, 나는 수동적으로 고개 숙이며 인사하며 다녔다. 그들은 불쑥 나타난 내 존재가 썩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마치 '새로운 감시자가 생겼군!'이라는 눈빛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다여섯살 정도 많은 남자직원들이었다. 직원들의 분위기가 신경 쓰였는지 아버님은 그들에게 '도와주러 온 거야!'라는 말로 그들의 감정을 추슬렀다. 사무실 책상에는 전날 매출 품목 구성비와 매출액이 뽑혀 있었고, 그날의 행사품목과 주변 경쟁사들의 마트 전단지가 놓여있었다. 첫 출근에 파악해야 할 자료가 정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장 지금 우리 마트의 매출이 급속도로 하락 중인 상황 때문인지 직원들 표정이 어둡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첫 출근부터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마트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난 위기에 강한 편이었다. 수능 보기 2주 전 첫사랑이 다른 여자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는 걸 내 눈앞에서 봤을 때. 나는 순간 놀라고 당황했었다. 당황한 마음에 근처 약국에 들어가 우황청심환 한 병을 마시고 그 둘 앞에 섰다. 내게 잠시 연락을 하지 말자는 말이 헤어지자는 말이었냐며 되물었다.


"나랑 헤어지지 못하고 이 여자를 만나는 건
나한테 미련이 많았구나?
둘 중 누굴 만나야 할지 저울 중이었어?"


라며 하고 싶은 말을 싹 다 쏟아냈다. 나는 약기운에 이런 기지를 발휘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정작 약기운은 그렇게 한바탕 한 뒤에 올라왔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더니 집에 도착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숙면을 취하고 나서 다시 독서실로 향했다. 그리곤 난 말끔히 그 날을 잊었다. 이상하게 나는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고 내가 취해야 할 것에 집중하게 된다. 책상 위 산더미 같은 매출전표와 떨어지는 매출그래프를 보며 나는 내게 주문을 외우듯이 말했다.


‘나는 위기에 강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집중해 보자!’


매일 듣던 컴퓨터 타자소리는 카트 바퀴소리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빠른 모드 전환이 필요했다.

형식적인 건 빠르게 생략해야 했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해야 했다. 일단 주변 상권 거주자들의 인구파악 조사가 필요했다. 주변 큰 아파트 단지는 없었고 주택단지가 밀집해 있었다. 거주자 분석해 보기로 했다. 먼저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통해 S마트 인근 네 개동을 조사했다. 주 거주자들은 50-59세는 20.3%, 40-49세는 16%, 30-39세는 14.6% 로 주 고객층이 40-59세 들이었다. 실제 마트 방문 고객들을 관찰해 보니, 50-59세는 주로 일반 소비자, 40-59세 들은 요식업 종사자들의 비중이 높았다. 50대 소비자들은 주로 단골이 많았고 충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배달이 여러 번 늦어지고 잘못 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왔다. 이해가 좀 안 됐지만, 오래 다니던 곳에 대한 편안함과 직원분들과의 관계가 그들을 계속 오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번 단골이 되면 잘 움직이지 않는 50-59세 소비자를 유치하면 가장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될 것이었다. 문제는 40대는 소비자들의 이탈이 많았다. 배송이 늦어지고, 가격이 좀 비싸다고 느껴지면 주변마트로 옮기는 효율적인 소비자들이었다. 장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모바일로 가격을 비교하며 구매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예전 회사에서 트렌드 분석할 때는 주로 해외저서나 콘셉트쇼들을 보며 예측하는 일을 많았다. 현상이 두드러질 때는 신문기사나 영업사원들을 통해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현장에서 새로운 흐름이 보일 때는 보고서를 쓰느라 바빴다. 현장에 가 볼 시간도 소비자 의견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트 출근을 하며 매장에서 소비자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 말에 기울이다 보니 그들의 니즈가 뚜렷하게 보였다. 해리티지가 있는 제품을 찾고, 과일코너와 육류코너에서는 제품을 보고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니즈를 파악하는 힘이 조금씩 생겼다.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하고,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과일이나, 육류코너 앞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계획에 없던 소비로 망설이는 시간들이었다.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브랜드들을 메인자리에 배치하고, 과일과 육류 코너에 좀 더 매혹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고객들이 무엇을 관심 있게 보고, 어떤 가격에 흔쾌히 바구니에 담고, 어디서 머무르는가! 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면밀한 고객탐구가 시작됐다. 매대에 보기 좋게 놓여있는 다우니 신제품 보다 바닥에 진열된 피죤만 꼭 찾아가는 손님, 석류주스가 없다며 불평하는 게 아니라 다음에 갖다 놓으면 꼭 사갈 테니 진열해 놓으라는 손님도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빠른 배송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아이러니했다. 현장에 없으면 전혀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카트에 물건을 담는 고객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동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마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고, 그들이 주로 담는 품목들을 보며 재고파악과 주문발주 시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모든 아이디어는 현장에 있었다. 회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려 했던 내 계획이 이뤄지지 않은 덕분에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시장을 보는 힘이 생겼다. 계획대로 되지않아, 좀 더 체계적으로 시장을 파악 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하루였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땐, 분몀 내게 보내는 메세지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메세지들이 있을까!?


P.s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카트 없이 주위를 서성인다면 '매장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 하고 노력 중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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