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첫날
퇴사 후 첫날. 알람을 끄고 다시 뒤척이다 잠들려는 행복한 상상도 잠시, 몸이 습관처럼 날 깨웠다. 평소처럼 7시 30분에 기상했다. 출근하지 않는 평일 아침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등산이었다. 가보지 않았던 산에 가보고 싶었다. 마치 새로움을 정복하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고자. 내겐 지금 그런 자신감이 필요했다. 북한산, 청계산, 관악산, 아차산, 인왕산등 가봤던 산들 사이에 '수락산'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들어보는 산이었다. 알고 보니 수락산은 修樂山 (닦을 수, 즐거울 락, 산산) “마음을 닦아 즐거움을 얻는 산” 또는 “수양하며 즐기는 산 ”이라는 뜻이었다. 내 이름에도 같은 한자가 쓰여 호감도는 더욱 높아졌다. '퇴사 후 첫날 마음을 닦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선택인가!' 바로 짐을 챙겼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평일 오전의 공기는 맑았고 새소리는 청아했으며 나뭇잎들은 뭐 하다 이제야 여기에 왔냐며 새침하게 살랑거렸다. 숨이 가빴지만 마음은 느슨했고, 허벅지가 타는 듯했지만 머리는 맑았다. 양가적인 몸상태가 나를 정신없이 정상으로 밀어 올렸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뷰는 그림 같았다. 위에서 바라보니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작고 좁은 데서 울고 웃고 참 다사다난했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이렇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웃고 넘길 일도 많았을 텐데, 어쩜 그렇게 마음에 담고 으르렁 했는지 말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던 말을 자주 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볼 생각을 그땐 왜 못했을까! 앞으로 생각이 깊어지고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땐 산에 올라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왔던 길을 다시 가거나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번 등산의 취지처럼 새로운 길로 가보자는 마음에 반대쪽 길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 많이 보였던 등산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정상에서 천천히 쉬다 내려오는가 하고 생각했다. 울창했던 나무들이 걷히며 거대한 암벽을 만나는 순간 깨달았다. '모두 반대쪽 계단길로 내려갔겠구나!'
맨손으로 내려가기 어려운 암벽에는 로프가 달려있었다. 로프를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 바위만 내려가면 나시 울창한 숲길이 나타날 거라 믿으며.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계속되는 암릉지대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올라가 반대편 길로 내려가는 게 나을까 생각했을 땐 이미 반 정도 내려온 상태였다. 너무 당황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등산로가 아닌 다른 샛길로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를 만났다. 온몸이 감전되는 것처럼 저릿했다. 조심조심 안전지대로 자리를 옮겨 등산로를 찾는데 찾아지지가 않았다. 주변엔 등산객도 전혀 없었다. 5월인데도 스치는 바람이 칼날같이 매섭게 느껴졌다. 이렇게 조난이 되는 건가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온 감각을 곤두세워 왔던 길을 다시 올랐다. 가시덩굴을 헤치며 다시 등산로로 복귀했다. 등산로도 아닌 길로 왜 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낭떠러지의 반대쪽으로 가야 한다는 본능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결국 몇 번의 암벽과 가시덩굴을 맞섰고, 앞 구르기와 다리 접질림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두 다리가 아닌 엉덩이로 하산했다. 하산을 하고 벌벌 떨리는 두 다리를 끌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나 혼자 꿈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모두 이 정도 산쯤은 가뿐하게 오르내린다는 듯 가벼운 웃음과 수다가 카페를 채우고 있었다. 같은 산을 너무 다르게 경험한 듯했다. 그들도 처음 이 산에 올랐을 때 이토록 힘겹고, 자신이 딛는 한 치 앞 길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번의 등산을 통해 자신에게 잘 맞는 등산로를 선택했을 것이고, 등산로의 난이도에 맞춘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숨 가쁘지만 자신만의 페이스에 맞춰 기분 좋게 하산을 했을 것이다. 처음 만나는 경험은 사실 어설프고 힘든 게 당연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인드 세팅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러 번의 훈련과 경험을 통해 결국에는 웃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그들과 함께 나도 커피잔을 내려놓고 여유 있게 웃음 지었다. 그제야 수락산의 이름을 다시 새겼다. ‘마음을 닦아 즐거움을 얻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