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움직이는섬 Oct 03. 2016

#09. 아홉 번째 파도: 시련은 피할 수 없다.

김인숙의 단편소설 <아홉 번째 파도>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내 목숨도 빠뜨릴 뻔했군. 허구한 날 그랬지. 혹시 아홉 번째 파도라는 거 아나? 그런 게 있다네. 파도가 점점 더 거세지다가 아홉 번째에 이르면 사람을 삼켜버릴 정도로 대단해지거든. 그걸 조심해야 한다네. 낚시보다 먼저 배워야 하는 게 파도라는 거야. 낚시는 천천히 배워도 파도는 먼저 배워야 한다네.”


바다의 파도는 하루 종일 몇 번이나 칠까. 세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횟수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테니까. 단 하루 동안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일주일, 한 달, 일 년 동안 치는 파도의 횟수를 세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무한에는 얼마를 곱하든 무한이니까. 하지만 파도에도 제각기 크기가 있는 법이다. 모든 파도를 고려하는 건 무의미하겠지만,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아홉 번째 파도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도의 횟수를 셀 수 없다면, 그것이 아홉 번째인지 열 번째인지, 아니면 첫 번째인지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그저 ‘아홉 번째 파도’가 별 탈 없이 지나갔기를 바랄 뿐이다.          




보통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특히 그 취미가 운동이라면 많은 이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계획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새해에 다짐하는 금연이나 다이어트와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만은 아홉 번째 파도를 넘어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수영을 시작했을 당시의 나 역시 그랬다. 운동이란 게 하고 나면 더없이 뿌듯하고 상쾌하지만, 시작하기 위해서는 온갖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더구나 그게 아침잠을 줄여가며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높은 장애물에 걸릴 염려가 있다. 이런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내가 세운 계획은 성실보다는 자기기만이었다. 최저가 수영복 세트를 구매함으로써, 첫날 이후 안 나가는 상황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금전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현명한 행동인 것 같지만, 한없이 우둔한 나의 계획이란.




수영을 다니기 시작할 당시에 앞서 인용한 <아홉 번째 파도>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를 사로잡았던 건 ‘아홉 번째 파도’라는 표현 자체였다. 그리고 내 목표는 아홉 번째 파도를 피해보자, 로 정해졌다. 다시 말해 적어도 수영장에 아홉 번은 나가자고 정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다짐이었던 것 같다.


일주일에 3회 강습이기에, 3주만 성실하게 나가면 성공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더구나 9월 중간에 추석으로 인한 연휴가 길어,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한 번 쉬면 귀차니즘이 몸에 배어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만. 오히려 백수인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바쁜 직장인들과 달리 시간이 많았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백수의 삶에는 엄마의 잔소리 말고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 잔잔한 파도만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장점이었다.                       


이때부터 내 삶은 수영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기에 아무리 늦어도 오후 11시에는 잠을 청했고, 수영장에 가기 위해 오랫동안 묵혀놓은 자전거를 꺼냈으며, 가능하다면 약속도 수영을 나가는 월수금 전날 밤은 피하려고 했다. 식생활도 변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아침을 먹지 않았던 나는 수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한 식욕을 느껴 빵을 사 와서 먹었고, 에너지를 북돋우기 위해 아침마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홉 번째 파도를 넘어서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홉 번째 파도가 아니었다. 아홉 번째 파도가 인간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의 자잘한 파도들이 모여서 힘이 응축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생각하기도 전에 매일매일 맞이하는 파도를 넘기기도 벅찼다. 아무리 일찍 자도 이른 아침 일어나는 건 고역이었고, 수영을 다녀온 날에는 체력이 방전되어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아홉 번째가 오면 여지없이 무너지겠단 생각을 하며 매일 아침을 맞이했다.


전날 잠이 들기 전에 항상 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내일은 가지 말자, 너무 피곤하다, 라는 것. 그래도 수영장을 재촉하는 알람이 울리면, 아홉 번째는 만나보고 무너져야지,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수영이 주는 즐거움이었지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강습일.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 지각은 했지만, 결국에는 아홉 번째 파도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매번의 준비과정으로 그 거센 파도를 해치고 휩쓸려가지 않은 것이다. 낚시하는 법보다 파도를 먼저 배워야 하듯이, 수영하는 법보다 아침에 일어나는 법을 먼저 배운 백수의 뿌듯함이란. 그리고 다른 직장인들은 그런 일은 몇 년째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감격해하는 그 모습이란.


최초의 계획은 성공했고, 나는 한 달 개근을 노려야겠다고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뭐, 아홉 번째 파도도 넘었는데, 열 번쯤이야. 그리고 다음 강습일, 눈을 뜨니 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아홉 번째를 피했다고 좋아하다가 열 번째 파도에 거칠게 뺨을 맞은 내가 있었다. 내가 계산했던 아홉 번째 파도는 실은 아홉 번째가 아니었던가.




역시나 바다에 치는 파도를 세는 건 불가능하고도 무의미한 일이다. 나에게는 열 번째 파도가 아홉 번째 파도였으니까. 어디가 첫 번째 파도고, 어디가 아홉 번째인지를 결정할 수 없기도 하고. 어차피 파도는 바다 위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무한히 반복하는데 횟수가 뭐 중요할까. 내가 겪었던 첫날의 시련이 아홉 번째였을지도 모르고, 아직 아홉 번째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매번 다가오는 파도를 고려할 수밖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홉 번째 파도를 몇 번이나 만날까. 그것도 셀 수는 없겠지만, 적은 횟수는 아닌 것 같다. 파도가 무한하다면, 아홉 번째 파도도 끝없이 다가올 테니. 수영장을 다니며 만난 파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저 백수의 삶에서만 수영장이 중요한 바다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욱 크고 무거운 장벽에 가로막히곤 하니까. 학교생활이 그렇고, 군대생활이 그렇고, 직장생활이 그렇고, 가정생활이 그렇고, 연애가 그렇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파도가 때론 거칠고, 때로는 잔잔하겠지만, 파도는 우리를 무수히 찾아와 몸을 부딪혀 올 것이다.




소설 <아홉 번째 파도>의 또 다른 문장은 이러하다.


“남자와 함께한 낡거나 늙은 시간들 동안, 그들은 수도 없이 헤어졌다가 만났고, 그사이에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었고, 아이를 낳았었고, 바람을 피웠었고, 이혼을 했었고, 또 다른 연인을 만나 변변하거나 변변치 않은 연애를 했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몇 번이나 아홉 번째 파도를 만났었을까. 아홉 번의 아홉 번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늘 여덟 번째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소설의 문장이 가리키는 파도는 사랑에 한정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학교생활이 그렇고, 군대생활이 그렇고, 직장생활이 그렇고, 가정생활이 그렇고, 연애가 그렇듯이, 파도는 어디서나 계속해서 찾아오니까. 아직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수없이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 모든 파도는 아홉 번째 파도였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09’이지만 열 번째이다. 아홉 번째인지 열 번째인지 모르는 파도인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08. 타인의 시선 벗어버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