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기차이지 기차역이 아니다.
꿈꾸는 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개의 객차로 이루어진 기차와도 같은 것이다.
꿈을 꾸거나 기이한 경험에 휩쓸리면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가로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알레프/파울로 코엘로
서랍 속에 넣어둔 손바닥만 한 스프링 노트를 꺼내 보았다.
코팅이 되어있었던 표지는 낡아 있고 스프링의 페인트 된 색깔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언제부터 쓰던 노트일까 펼쳐서 앞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본다.
'경인년'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2010년 새해 기록인 듯하다.
그렇다면 2009년에 나에게 온 노트인 것이었다.
학부모 상담을 하기 위한 상담 멘트도 여기저기 흩어져 적혀있다.
뒤표지는 물기에 젖었는지 누렇게 얼룩이 스며들어 있다.
한동안 차 운전석 문 사이 틈에 넣고 다녔던 노트이다.
글씨를 갈겨쎠서 알아볼 수 없는 문장도 있고
정갈하게 정성을 들여 쓴 문장도 있다.
출처가 없는 문장도 있고 발췌한 곳의 책을 적어 놓은 문장도 있다.
그중 파울로 코엘로의 <알레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은 길들여진 날들이었을까
꿈이 없는 사람은 길들여지는 생을 살 수밖에 없다.
꿈이 있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행하는 사람이다.
나의 본질과 정체성을 알고 기차에 오른 사람일 것이다.
여러 객차에서 나는 어떤 칸에 머물러 있었을까
이 칸과 저 칸 사이엔 바람처럼 날아가는 시간이 있었다.
꿈을 꾸는 일과 기이한 경험들은 예기 치도 않았던 일들로 인한 상실과 고통으로 휩쓸려
가로질러 간 또 다른 객차 안일 것이다.
모든 객차에는 유리창과 의자가 있다.
바라보는 풍경은 비슷해 보이지만 곁을 주었을 때에야 다름을 알 수 있다.
다가가 앉아 보면 얼룩이 묻은 의자가 있고, 스프링에 눌려 비대칭이 되어 있는 의자도 있다.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의자들 내가 앉아 보았을 때 내가 곁에 가서 살갗을 닿고
느꼈을 때야 알 수 있는 편안함이다.
누군가 내 곁을 다가왔을 때 난 편안한 사람이었을까
과거의 상처로 인해 얼룩진 상흔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내 마음속에 편재해 있는 파편들로 인한 피해의식과 편견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까
파울로 코엘로의 <알레프>가 책장에 꽂혀있다.
먼지를 털어내고 책을 펼쳤다. 인덱스도 몇 개 붙여있지 않고 중간중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흔적이 남아있다. 코엘로의 작품에 빠져있었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15여 년 전의 나는 현실회피형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재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