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기 시작 전 어둠은 더 짙다. 동이 트려면 아직 한 시간가량 남은 새벽 4시다. 5시 30분까지 유심칩을 찾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찍 출근하는 차들의 전조등과 가로등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예기치 않는 일로 여행을 함께하는 일행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나리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7년 전 친구들과 오사카 여행 이 후 해외여행은 이제 일본은 가지 않을 거라 말했던 과거의 나를 조소하며 현재의 나는 도쿄 여행으로 들떠 있다. 새벽 시간인데도 인천 공항 안에는 여행을 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글을 잘 쓰는 그녀는 무라카미 하루키 덕후였다. 그녀의 글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카를 융의 ‘무의식의 자기실현’이라는 문장 하나에 하루키의 신간을 읽기 시작했고 그의 세계관에 빠져들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의 문장 속에서 유영하고 매달 그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린 일본 도쿄 여행을 계획했다. 사는 곳, 나이도 다른 중년의 여인 셋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서관 투어를 위한 여행이었다. 인생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멋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일본 작가의 모교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니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책을 읽고 만났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잖아?”
여행을 간다는 말에 친구의 말이었다. 과거의 나를 “왜?”라는 질문을 통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를 보고 미래를 향하는 시간 속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녀들은 좋아하는 것을 뚜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지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년의 나이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공허함을 채우지 못해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우리는 하루키라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 저질체력으로 많은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막내 덕분에 교통카드를 발행하고 메지로 역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한참 지나있었다. 숙소 근처 스시집에서 시원한 맥주와 간단한 점심을 하고 체크인을 먼저 했다. 그리고 오후 일정이었던 츠타야 서점부터 찾아갔다. 지하철을 타고 길을 찾는 일을 도맡아 하던 막내의 손위에 핸드폰은 구글 맵이 켜져 있었고 길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는 일도 막내가 했다. 우리는 모두 P였다. 나는 딸들과 하는 여행에 익숙해져서 일정과 식당을 정하는 일을 모두 큰 딸이 도맡아 했었다. 친구들과 여행에서도 J였던 친구가 미리 계획을 짜두었었다. 하지만 여행에서 일정을 모두 소화하다 보면 식사를 놓칠 때도 있고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다른 일정을 취소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은 곳 한 두 곳이 정해지면 다른 건 계획하지 않았다. 계획 없는 일정에 투정하나 부리지 않고 이해하는 막내의 마음이 고마웠다.
츠타야 서점에서 문학 코너의 하루키 책들을 보고 환호하는 중년의 여인들의 모습이라니 지금도 그때의 순간을 떠오르면 미소를 짓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을 찾아가 하루키 도서관을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몸짓으로 질렀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그의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표지 그대로 꽂아있는 모습을 보며 반가워 꺼내 만져 보았다.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는 하루키의 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하루키의 책은 모두 읽었다는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않은 그의 책을 발견하는 순간, 희열을 느끼는 모습은 아이가 막 걸음마를 뛰며 좋아하는 해맑은 모습 그 자체였다.
테마여행이 좋은 이유는 취향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일은 나에게 있는 선을 그녀들의 선과 연결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많은 일정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저질체력도 같았지만 그녀들과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일상을 기록하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을 함께 읽는 것이었다.
“이것 보세요. 첫 단락을 읽어보세요.”
에어컨 바람이 운동화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발에 냉기가 번져 욱신거린다. 평소보다 2배 이상을 걸어 다닌 다리는 퉁퉁 부어 온몸으로 열기를 끌어올려 미열까지 있었다 글을 잘 쓰는 그녀는 비행기 안에 있는 매거진에 나온 여행기를 읽고 있었다. 기자의 글 시작 묘사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첫 단락부터 읽는 이를 자신의 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글쓴이가 머물러 있던 그 공간안에 내가 앉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저도 여행기를 이렇게 써봐야겠어요” 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그녀는 피곤은 온데 간데 없이 글 속에 빠져들었다 역시, 글을 쓰는 이는 태도가 달랐다. 매거진 속에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읽으며 첫 단락과 글의 전개를 비교하고 있었다. 좋은 글을 읽으며 따라 써봐야겠다는 열정으로 그녀는 피곤을 풀고 있었다.
하루키는 여행을 하면서도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글을 쓴다고 해요. 라며 자신의 글쓰기를 미리 예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삶을 사랑하는 열정을 보았다. 하루키처럼 글을 잘 쓸수는 없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를 배운다면 글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나도 그녀가 읽는 페이지를 들춰보며 첫 단락을 사진으로 찍어왔다.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린 서로 기록한 글을 공유하고 행간속에서 공감과 감성의 사이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