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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 경 Jul 10. 2023

양이의 걸음걸이와 유연성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시절에는 고양이가 골목길을 어슬렁대거나 인기척에 줄행랑치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폴짝폴짝 수풀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도 다람쥐처럼 귀엽기보다 음침한 공격성으로만 느껴졌다.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 사람에 대한 경계를 잔뜩 품고 멈칫하는 걸음걸이, 어둡고 좁은 곳만 살금대는 걸음걸이 등에는 어둠의 기운이 서려있다고 생각했다. 양이와 하루종일을 같이 하다보니, 음흉스럽게만 여겨졌던 고양이의 움직임과 동작들이 이해가 되고, 심지어 경이롭기도 하다. 다양한 형태의 걸음걸이, 높은 곳을 오르고 내리는 유연성, 공간에 맞추어 몸을 만드는 기술, 지혜로운 앞발의 사용, 활처럼 휘어지는 척추와 다리 등은 직립 인간이나 강아지와는 확연히 다른 매력이 있다. 


양이는 다양한 걸음걸이를 뽐내는데, 사뿐사뿐한 걸음, 총총 걸음, 느긋한 걸음, 쏜살같은 걸음 등 각각의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양이의 걸음은 사뿐사뿐 다가오는 걸음새이다. 책상에 앉아 있거나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향해 다가올 때, 식사나 간식 시간을 알리러 올 때 나오는 걸음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에 솜방망이 네발을 리듬감있게 사용하는데, 공손하고 친근함이 전해진다. 총총거리는 양이의 걸음에서 느껴지는 신중함과 공손함, 조심성은,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자세를 낮추며 예의를 다하는 궁중 나인들의 총총 걸음을 연상시킨다. 총총 다가온 양이를 보면 반가움과 정겨움에 머리를 쓰다듬고 요구 사항을 들어주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조용히 예의를 갖추고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거부감을 갖기는 쉽지 않다. 내가 양이에게 귀를 기울여 무엇을 원하는가 알아보게 되는 것과 같이, 총총이 다가온 사람에게는 관심과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간의 시간과 공간, 기분 등을 깜빡할 때가 있다. 서로의 존재를 너무 당연시 여기면 상대방의 상태나 원함, 불편함에 대한 생각을 생략하기 쉽다. 서로를 믿고 잘 안다고 생각하면 상대방도 나의 의도나 생각을 당연히 알 것으로 전제하고, 서로 다른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고 기분이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반응에 당황하는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한테 몰입해 있어 상대방의 기분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바쁘고 정신이 없어 상대방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경우가 반복되면, 관계에는 오해와 섭섭함이 쌓이게 된다. 한편, 때로 잘 해준다고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오히려 부담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과 내가 같은 페이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깝고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다. 감정적인 말, 충동적인 행동, 명령조나 요구조의 말투, 가르치고 훈계하는 타이밍, 원함이나 요구를 두리뭉실 표현하는 것, 비난과 탓하기, 과거의 일 끄집어 내기, 피해자 마인드(내가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생각) 등이다. 오래 전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 교육을 할 때 조심하면 좋을 말투의 예들을 설명하곤 했다. 설교하는 말투, 강요하는 말투, 무시하는 말투, 가볍게 여기는 말투, 반대로 너무 심각한 말투, 제압하는 말투,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 캐내듯 조사하는 말투, 비아냥거리는 말투 등등. 이러한 말투들은 가까운 관계일수록 대화를 방해하고 상처와 갈등의 여지를 남기며, 무엇보다 마음의 문을 닫게 할 때가 많다. 


양이의 치명적인 매력은 부드럽게 휘어지는 몸과 자유롭게 접어지는 앞발이 아닐까 싶다. 오징어와 같은 연체동물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이의 유연성은 정말 놀랍다. 상황과 이유에 따라 자세를 유연하게 바꾸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작은 틈새로 몸을 작게 만들어 들어가는 모습, 종이 상자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맞추어 들어가 앉는 모습, 옷장의 구석을 활용해서 보금자리로 만드는 모습, 클레오파트라가 앉았을 법한 팔걸이 곡선 의자에 몸을 휘어 걸치는 모습 등 자기 몸을 주어진 조건에 맞추는 기술은 동물 중에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심리학에서도 유연성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고정된 생각에 매이는 대신, 맞닥뜨린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유연한 사람은 계획이나 예상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고, 잘 되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긍정적인 생각을 품는다.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화나고 기분 나쁜 상태로 오래 있지 않고 툴툴 털고 잊어버린다. 과거의 사건이나 상처를 곱씹으며 주구장창 머무르지 않는다. 반대로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동일한 방식만을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양이의 유연성이 아닐까 싶다. 좁으면 좁은 데 맞게 몸을 끼우고, 높낮이에 맞추어 구부림과 속도를 조절하는 양이의 유연성 말이다. 삶의 변화와 상황에 따라, 때로 상대방에 따라 나의 욕구를 조절하고 맞추는 것은,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미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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