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의 과거를 자꾸 들추고 싶지는 않지만, 양이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과거에 매이지 말자! 라는 말이다. 양이는 길거리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출신으로 첫번째 주인에게서 잠시 길러진 후 유기묘 센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바 있다. 길거리를 떠도는 고양이들이 마음씨 좋은 집사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험난한 길바닥 삶으로 인해 오래 살지는 못한다고 들었다. 어두운 과거가 있지만 양이의 운명도 그렇게 가혹하지 않은 것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집 반려묘로 묘생 중반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4년이란 세월에도 불구하고, 양이는 과거의 치열했던 삶에서 습득한 생존 습관들을 갖고 있다. 우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여 벨소리, 전화소리, 문소리에 도망을 가고, 자주보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방문에도 하루 종일 숨어있다가 화장실 때문에 참다못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양이의 숨기로 인해 몇 번의 숨바꼭질 해프닝도 있었다. 이사하는 날 양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양이를 옮겨다 놓고 이삿짐 직원들의 동선을 피해 공간을 확보해 주었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 탐정에서 본 것처럼 열어 놓은 현관으로 도망을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는데, 잃어버린 양이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것도 슬펐지만, 양이의 친엄마 격인 딸의 슬픔과 원망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눈물범벅으로 구석구석을 헤매다 안방 화장실 세면대 뒤에 엉덩이만 내놓은 채 숨어 있는 양이를 발견하였다. 하필이면 화장실 타일이 양이의 털색과 비슷한 어두운 브라운 계열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지나친 것이다.
양이의 또다른 습관은 특정 브랜드에서 나온 닭고기 한 종류만을 먹는 것이다. 골고루 먹이면 좋을 것 같아 여러 종류를 시도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심지어 사람이 먹는 고기나 생선도 조리해 보았지만 양이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고양이들은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은 커서도 먹기 싫어한다는 설명을 보면서, 양이의 식성이 이해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양이에게 음식의 신세계를 열어 주고 싶지만 양이는 여전히 닭고기만 먹을 따름이다.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과 그 경험으로 인해 쌓은 생각과 습관들을 떨쳐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버스에서 다친 사람이 버스타는 것을 조심하게 되고, 불편함을 겪었던 장소는 다시 가고 싶지 않고, 무례한 사람은 멀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괴로움과 고통을 예상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아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나 사고 등으로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은 예민함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혹시나 마주칠 수 있는 안 좋은 일이나 사람에 대해 촉각을 세우다 보면, 과민함을 습관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부정적인 경험을 저장하고 기억하는 기능이 훌륭한 탓에 사고나 불행을 예방할 수 있지만, 동시에 움츠려 들고 피하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갖게 하기도 한다. 트라우마 현상은, 우리가 얼마나 과거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몸과 마음이 영향을 받게 되는 가를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힘들었던 경험과 그것에서 비롯된 습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종종 그것의 영향력에 휩싸여 일상의 한계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양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양이의 치명적인 특이함은 높은 곳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고양이는 수직 동물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깥이나 아래를 쳐다보는 데서 안전감을 느낀다고 한다.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 흔히 냉장고나 높은 선반 위에 올라가 있거나, 천장 높이까지 닿는 캣타워에 올라가 쉬고 있는 고양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많아 벽이나 가구를 긁는 고양이들에 대한 처방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캣타워가 추천되기도 한다. 일찌감치 장만한 4층짜리 캣타워에 양이는 1층만 올라가서 자거나 햇빛을 쪼인다. 2층까지 올라가 보도록 간식과 놀이를 사용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성인 키 높이 되는 수납장, 선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양이는 1층 높이 외에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물병원 의사의 추정에 의하면 아마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앞니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추측일 뿐이지만, 양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 높은 곳에서 떨어진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양이의 삶에는 어린 시절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생존 습관에 매여, 보통 고양이가 좋아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차단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어두운 과거의 상처나 기억을 극복하고 맘 편히 사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다. 어제 오랜만에 보일러 수리하는 분의 방문이 있었다. 쏜살같이 숨었다가 수리하는 분이 떠난 후 나타난 양이는 몇 시간 동안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자발적으로 다가오는 일이 없는 양이가 옆에 달라붙는 것을 보며, 4년이란 시간을 거쳐 양이에게도 무서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대견하고 기뻤다.
우리의 삶에도 어린 시절이나 과거에 겪은 힘든 일이 평생의 그림자로 따라다닐 때가 많다. 심리학에서는 오 세 전의 양육 경험이 이후의 성격과 발달, 성인이 되어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와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한편 성인이 되어 경험한 사고나 사건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거나 열등감을 갖게 되고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를 겪기도 한다. 또한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과거의 아픈 경험이나 실패, 실망 등을 떨쳐 버리지 못해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에 살아가기도 한다. 과거를 극복하는데 제일 확실한 치료제는 시간이고, 두번째는 힘든 기억을 상쇄시킬 수 있는 좋은 경험이 쌓아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우리가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렛고가 아닐까 싶다. 렛고(let go)란 붙잡지 않는다, 놓아준다는 뜻으로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렛고가 쉽게 되지 않은 것들의 몇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게 들은 기분 나쁜 말, 순간의 착오로 놓쳐버린 기회,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실패 경험, 어처구니없이 저지른 실수 등은 창피함과 죄책감, 억울함, 슬픔 등의 감정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되풀이된다. 렛고는 불행한 과거의 시간과 경험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화해와 용서를 하는 것이다. 부족했던 자신, 실망스러웠던 상대방, 잘 풀리지 않았던 일, 실패의 비참함 등을 삶의 한 과정으로 수용하면, 매임에서 자유로워진다.
힘든 일 일수록 깊고 아프게 각인되어 떨쳐 내기가 어려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잊어버려야지 하지만 문득 떠오르고, 어떤 일이나 사람이 자극이 되어 다시금 괴로운 감정이 솟아나고, 장기적으로는 무기력과 우울 모드로 접어들게도 한다. 힘든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실패한 일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놓친 기회를 또다른 도전으로 만회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지만 양이가 조금씩 나를 의지하며 무서움을 해결하는 것처럼, 과거의 아픔도 새로운 기회와 시간을 통해 렛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속상하고 절실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깊이와 농도가 옅어진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는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