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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 경 Aug 01. 2023

천천히 갈 때가 있다

양이가 명실공히 우리집 반려묘로 자리잡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뉴욕 고양이로 살다가 서울 고양이로 변신하느라 나라간 이동과 문화 충격 탓도 있겠지만, 워밍업을 충분히 해주어야 걸리는 엔진과 같이 양이는 새로운 변화와 적응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스타일이다. 일례로 낯선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크던지, 처음 이사 후 열흘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걱정되어 찾아보면 소파 밑이나 장 속에 들어가 웅크린 채 꼼짝도 안 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배도 고프고 소변도 보고 싶을 것 같은 양이에게 아는 척하고 싶지만, 아는 척 자체가 공포심을 유발하기에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숨어있는 양이에게 밥그릇과 물그릇을 대령해 보았지만 잘 먹지 않았다. 추측해보면, 모두가 없거나 잠든 사이 새로운 장소를 탐색할 겸 살그머니 나왔다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십대 중반에 고국을 떠나 삼십년 이상을 해외에서 생활하였다. 이민 보따리를 작정하고 싼 것도 아닌데, 어찌어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덕분에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았고 직장도 수차례 바꾸어 보았다. 처음 이민 가방을 쌀 때는 고국에 못 돌아올 것 같은 비장함으로 쌌었고, 첫 직장도 영원히 다닐 것 같은 결연한 마음으로 다녔다. 그만큼 첫 이사와 첫 직장은 힘겨웠는데, 새로운 곳에 부적응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민 가방을 쌀 즈음에는 이전 경력들이 있다 보니 한결 여유로웠고, 나라간 이사임에도 불구하고 근처로 이사 가는 듯 가벼웠다. 첫 퇴직은 엄청난 망설임과 고민 끝에 감행했으나 두 번째 퇴직은 갑작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그만 두었던 경험으로 후유증이 덜 했다. 짬밥이 늘어난 효과이다. 이처럼 처음 시도하는 것,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처음이란 이유로 설레지만 두렵기도 하다. 또 처음이기에 만나는 실수와 착오가 있고, 실패와 후회 등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이 있기에, 두번째, 세번째는 쉬워진다.  


예전 상담에서 만나는 어머니들의 고민 중 하나는 우리 애는 느리다였다. 한글도 늦게 떼고, 구구단만 오래 걸린 것이 아니라 사회성 발달도 늦어 학교 생활이나 교우 관계가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크면 나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욕심도 없고 빠리빠리하게 자기 길을 못 찾아간다는 스토리이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나의 답은 늘 한결같았다. 대기만성! 큰 그릇이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한자 성어이다. 대기만성은 시간만 더 걸리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수고를 오랜 기간 더하여야 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늦게 만개하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레이트 블루머(late bloomer)도 대기만성과 같은 뜻이다. 자신있게 대기만성을 해답으로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가족 모두가 대기만성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겁많고 눈물많아 초등학교 적응을 하지 못한 탓에, 어머니가 일학년 일학기와 이학기 초반까지 교실 바깥에서 대기조로 지냈다고 한다. 나의 남편은 좀 특이한 대기만성이다. 결혼하고 나서 삼십대에 키가 칠 센티나 컸다. 중학교때 땅꼬마였던 남편이 삼십대 중반에 180센티를 넘나드는 장신이 된 케이스이다. 나의 두 딸들 역시 대기만성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혹독한 사춘기를 치렀던 큰 딸은 성실한 직장인으로 가는 중이고, 더 험난한 사춘기를 보낸 작은 딸도 좋아하는 직업에 안착 중이다. 우리 가족만 그렇겠는가? 집집이 모두 시간과 함께 방황을 접고 성숙해지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가족 구성원들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시간은 성장 촉진제가 되기에 시간을 믿고 길게 보는 안목과 재촉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양이처럼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적응 끝! 하고 한 방에 끝나는 과정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직장이 됬건 결혼이 됬건 오랜 시간의 노력과 고민, 선택의 과정을 거쳤기에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책임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직장을 옮기고 나면 옳은 선택이었는지 의심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겪는데, 새로움이 가져오는 낯설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결혼하고 결혼생활이나 배우자에 대한 실망과 회의도 마찬가지이다. 적응에 필요한 또 하나의 과정은 수고이다. 직장이라면, 달라진 곳, 분위기, 사람들, 책임과 의무 등을 파악하고 익히는 수고일 것이고, 결혼이라면 배우자와 주변 가족들, 새로운 생활 패턴과 협업, 서로에 대한 헌신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수고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게 되면 낯설은 시간은 길게 연장된다. 적응에는 상당한 인내심도 필요한 것 같다. 이사한 곳이 편해지는 때는, 그곳의 지리에 익숙해지고 생활 요령을 획득하는 때이다. 낯설음으로 인한 불편과 피곤, 혼란과 좌절을 참아내면 확신과 안전감은 찾아온다.  


여러 이유로 느리게 갈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건강 문제, 집안 문제, 돈 문제, 불운 등 빨리 갈 수 없는 조건에서 빨리 가지 못하는 것을 탓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정체되거나 방황하고 남보다 느리게 가고 있다면, 인생의 그런 때임을 알아주는 것이 힘이 되고 약이 된다. 인생에 정말로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만일 가까운 사람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 시간을 선물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그대는 대기만성 스타일이야. 지금은 느리게 가는 때이네, 기다려줄께 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인생은 살 만하구나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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