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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첫달, 나는 회사가 그리워졌다

episode 1

by 저스틴

육퇴가 사라졌다

육퇴, 육아 퇴근의 줄임말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아침에 일어나 아기를 보고, 출근할 때가 되면 와이프에게 아이를 맡기고 회사로 떠났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집으로 오면 다시 아기를 받아 목욕을 시키고 저녁 분유를 먹였다. 그리고 재웠다. 대충 계산해 보니 아침에 약 2시간, 저녁에 약 2시간, 하루에 4시간 정도만 보는 것이 직장인 아빠의 육아 스케쥴의 전부였다. 그런데 육아휴직을 시작하니, 집에서 떠나야 할 명확한 이유, 스케쥴이 없는 이상 육퇴란 키워드를 꺼낼 일이 없어졌다.

집에 함께 있는 이상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함께 처리해야 할 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기를 재우러 들어간 와이프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화이팅을 외쳤지만, 막상 방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이 아기의 울음소리와 잠에 쉬이 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 편히 소파에 앉아 쉴수도 없는 형국이다. 방에 같이 들어가지만 않았지, 같이 재우는 것과 다름없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나는 장난감 가득한 아기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괜히 어질러진 장난감을 하나 둘 치우고 정리해본다. 물론 소독 티슈로 아기 침이 묻은 장난감을 닦는 스케쥴은 당연히 포함이다.



아주 상당히, 꾀죄죄 해진다

우선 밖으로 나갈 일이 줄어드니, 꾸미고 밖으로 나갈 일도 줄어든다. 일어나 하는 거라곤 눈꼽 제거, 양치질 하는 정도다. 분리수거를 하러 가는 복장, 집앞 카페에 가는 복장, 그리고 밥먹으러 나가는 복장이 모두 동일하다. 여름엔 반바지와 반팔티, 그리고 뜨거운 햇볕 속 내 생얼과 피부를 막아 줄 검은 챙 모자 하나. 누구를 만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까? 물론 잘 보여야 하는 관계라면 머리에 왁스라도 바를테지만, 이미 친한 사이라면 똑같다.

모자는 같고, 옷의 색깔만 달라질 뿐이다.


불안해진다

육아 휴직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라 그렇다. 뭔가를 한창 하고 있다가, 갑자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상황 자체가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한창 바쁘게 살던 사람을 템플스테이에 넣어놓은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아기를 재우고 나와 부엌 식탁에 앉아서도 신문 뉴스앱을 켜 놓고 뉴스를 읽는 나를 발견한다. 육아휴직자에게는 오지도 않을 이메일이 혹여 왔을까, 갑자기 회사 이메일 앱을 켜기도 한다. 괜히 블라인드앱에 들어가 회사는 별일 없나? 하고 몰래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 행복할 시간, 편안한 시간이라고들 하던데,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만 멈춘 느낌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나만 멈추었나? 싶은 느낌이 든다. 아파트 단지를 나가도 학교, 회사를 나서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분주하다. 은퇴한 노부부가 산책로에 마련된 운동기구에 올라가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나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침부터 나와 산책 아닌 산책을 하고 있지만, 나만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영화 트루먼쇼처럼 마치 완전히 다른 세상에 내가 접속해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상대가 나를 바라볼 땐 엄청난 여유있는 삶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며 평온하고 안전한 삶의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인식한다. 현실과 생각의 왜곡이 일어나고, 상대가 생각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혼자 상상하며 아침 산책마저 불편하고 낯선 마음으로 이어간다.

나만 멈춘 것 같은 이 상황, 편치 않다.


휴대폰을 꺼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연락오는 사람은 거의 99% 없어진다.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연락오던 꽤 적지 않았던 연락들이 하나 둘 줄어든다. 대화거리, 공통사가 사라지니 연락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간혹 친했던 동료에게서 안부 연락 정도는 올 수 있지만, 그것도 초반에 아주 조금일 뿐이다. 2번, 3번 안부만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그 또한 사라진다. 결국 휴대폰은 없어도 된다. 육아휴직 아빠에게 휴대폰이란 아기가 잘 있나 카메라 앱으로 확인하는 용도, 그리고 와이프와 연락을 주고 받는 용도다. 물론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폰을 해지하는 일은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수많은 빌딩들, 차려 입은 직장인들은 남일이 된다

걸어가면서 보이는 수많은 회사 로고, 그리고 빌딩들은, 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공간이 된다. 반바지 입고 모자 쓴 육아휴직자가 들어가기엔 갑자기 낯설고 생경하다. 보통의 오피스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 들어서면, 뭔가 모를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 같은 피해의식마저 든다. 일할 시간에 여기서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는 게 가당키나 해? 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위의 속삭임마저 들린다. 그만큼, 휴직하고 첫달은 모든 게 낯설고, 불안하다. 그리고 있지도 않는 시선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과 적응의 과정이다.


회사가 그립냐고? 아니

사실 제목에서는 회사가 그립다고 했다. 물론, 특정한 상황을 마주하거나 생각이 들었을 그 순간엔 그렇다. 그러나 잠깐 심호흡을 크게 하고 돌아서면, 다시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그래, 네 발로 직접 나왔잖아. 나온 이유가 있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 회사 그리워 하는 거 아니야.‘ 맞다. 나는 회사가 그리운 게 아니라, 평범하고 안정됐던 그 삶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 낯선 것 뿐이다.

결국, 이제 해야 할 일은 빠르게 적응하는 것 뿐이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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