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밴쿠버, 패션계에서 자리 잡기
캐나다 내에서 혼인 절차를 밟고 영주권을 신청한 후 약 10개월이 지나, 드디어 이민 신청 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에서 “Decision Made”라는 결과가 뜬 것을 확인했다. 곧 법적으로 일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일 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패션 디자인을 부전공할 때 패션 마케팅과 머천다이징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머천다이징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케팅은 대부분 ‘말'로 진행되는 부분이 컸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담감을 떨쳐내기가 어려웠고, 마케팅 부의 직원을 고용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토론토나 몬트리올에 위치해있었다. 머천다이징은 말이 아닌, ‘시각적'인 비중이 큰 일이라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해 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에 위치한 유명한 쇼핑 거리인 ‘랍슨 스트릿(Robson Street)’에 포에버 21(Forever 21)과, 캐나다의 대표적인 백화점인 허드슨스 베이(Hudson’s Bay)에서 독점 계약을 맺고 탑샵(Topshop)이 새로 오픈하는 스토어의 직원을 고용한다는 채용 공고가 나왔고, 지원 후 두 군데 모두에서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포에버 21과 탑샵 둘 다 합격했지만, 대규모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판매 직원(Sales Associate)이 아닌 머천다이저로 일 할 수 있고, 시간당 급여 또한 더 많았던 ‘포에버 21’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일하게 될 랍슨 스토어가 아직 공사 중인 관계로, 밴쿠버에서 조금 떨어진 2 존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인 ‘메트로타운(Metrotown)’에 위치한 포에버 21에서 트레이닝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머천다이징 팀은 총 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의류 및 잡화를 담당하는 5명과 액세서리를 담당하게 될 2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보통 판매 직원들은 스케줄이 중구난방인 경우가 다반사인데, 머천다이징 팀의 경우 새벽 7시부터 오후 3시까지로 스케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매장이 오픈하기 전인 10시 이전에 미리 콘셉트에 맞춰 윈도, 벽, 테이블 디스플레이를 끝내고 오후에는 하루에 300박스씩 들어오는 신상품들을 진열하는 일을 마쳐야 했다.
메트로타운에서의 트레이닝이 끝나고 드디어 우리가 일하게 될 랍슨 스트릿의 스토어를 오프닝 할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위치한 본사에서 NSO(New Store Opening) 팀을 밴쿠버로 보내왔고, 그 팀들과 함께 거의 800평에 달하는 거대한 플래그십 스토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미국 및 캐나다 팀이 한데 힘을 모아 그랜드 오프닝을 위한 새로운 스토어 단장을 마친 후, 플래그십이라는 명성에 맞는 매장의 명성과 기준을 유지하기 위한 바쁜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비주얼 적으로 하는 일이라 그런지 패션 마케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맡은 컨셉을 이해하고, 어떤 이유로 왜 디스플레이 및 스타일링을 진행했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매니저 및 동료들과 함께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했기에 머천다이징은 물론이고 프레젠테이션 실력까지 겸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신속하고 빠른 일 처리 덕분인지, 나의 상사인 머천다이징 매니저는 60개가 넘어 섹션 별로 나누어서 하던 마네킹 스타일링 업무를 내게 모두 일임하였고, 월요일은 다른 머천다이저들과 함께 디스플레이 업무를, 남은 주중에는 스타일링 업무를 하는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한 주가 지나갔다.
하루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스타일링 업무를 하고 있는데, 시크하게 생긴 금발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캐주얼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가 자기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대형 신발 회사 알도(ALDO)가 소유한 신발 및 액세서리 편집샵인 ‘리틀 버건디(Little Burgundy)’의 스토어 매니저라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헤드헌팅 제안을 해왔다. 포에버 21에서 일한 지 1년 반이 지나 반복적인 일에 약간 식상하던 중이었기에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랍슨 스트릿의 노른자 땅에 위치하여 마주 보고 있는 쌍둥이 스타벅스 중 한 군데에서 면접을 보기로 하여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더니, 나를 헤드 헌팅한 제스(Jesse)와 그녀의 매니저가 동석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캐주얼하게 진행된 인터뷰는 커피숍에서 봐서 그런지 마치 친구와 대화하듯 물 흐르듯이 흘렀다. 인터뷰 후, 이메일로 내게 리치몬드(Richmond) 몰에 새로 생길 리틀 버건디 '스토어 매니저' 포지션을 제안받게 되었고, 연봉 협상을 거친 후 제안에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