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밴쿠버, 패션계에서 자리잡기
‘리틀 버건디(Little Burgundy)’는 반스, 나이키 등 스포티한 신발부터 트렌디한 닥터 마틴, 제프리 캠벨(Jeffrey Campbell), 그리고 밴쿠버에 기반을 둔 백팩 회사인 ‘허쉘 서플라이(Herschel Supply & Co)’, 모자로 유명한 미국 브랜드 ‘브릭스톤(Brixton)’ 등 세련된 감각을 가진 이들을 위한 잡화를 판매하는 곳으로 밴쿠버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편집샵이었다.
스토어 매니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매장의 재고 관리 및 새 상품 주문, 직원 고용 및 트레이닝, 머천다이징 및 윈도 디스플레이, 세일즈 및 실적 관리 등등 산더미 같았다. 기본 연봉에 4가지의 보너스를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봉이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 보너스들이 온통 판매 실적에만 집중되어 있어 인터뷰 때 약속받은 것처럼 쉽게 얻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모든 보너스는 사실상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인원으로 가장 많은 실적을 내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다. 물론 모든 회사의 목표는 돈을 벌기 위함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몬트리올에서 위치한 본사에서 내놓은 판매 계획과 실제로 매장에서 일어나는 세일즈는 천차만별이었고 탁상공론에서 낸 실적을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괴리에서 오는 압박감이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또한, 한정된 직원만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적만을 내기 위해 직원들을 쥐어짜 내듯 일해야 했고, 가끔 직원이 병가라도 낼 때면 내가 정신적이며 체력적으로 다 커버를 쳐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시간에 비해 받는 시간당 임금이 현저히 줄어드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포에버 21에서 일할 때 보다 하는 일은 더 늘어났는데 받는 돈은 더 적은 아이러니한 상태가 지속되자,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 회사의 오너를 위해서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의 일부분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참고 견디며 수개월 동안 일을 해 나갔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집으로 퇴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심지어는 쉬는 날에도 계속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거의 쉬는 날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일에 붙잡혀 있는 나날들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침마다 서울 출근길의 지옥철과 비슷한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리치먼드로 출근해야 하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하루는 기존 남은 재고 처리도 다 되지 않아 저장할 장소나 공간도 전혀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데, 몬트리올 본사에서 200박스가 넘는 신상품을 더 보내와 이를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무리 머리를 궁리해도 도무지 해결 방안이 나지 않아 결국 창고 관리를 하는 직원과 함께 12시간 동안 박스를 옮기며 창고를 정리하는 일을 해야 했다.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 '내가 이 일을 하려고 캐나다에 왔나...?'라는 생각이 들며 괴리에 빠졌고 결국은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메일로 내 상사에게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겠으니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해버리고 만 것이다.